* 초기설정 (불로불사 조커 X 클론 쉐도우), 개인해석 다수
* 캐붕, 오타, 급전개 O
* 살인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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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꿨다. 오랜만에 보는 풍경. 주변은 조용했다. 위를 올려다본 하늘엔 달이 떠 있었다. 은빛으로 빛나는 달. 저 달이 되어라. 하얀 가운을 입은 어른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부품이었다. 그들의 목표를 이루는데 필요한.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갈아 치울 수 있는. 나는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필사적으로 임했다. 부서지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 언젠가 인정받고 말겠어.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도움이 되지 못했다. 쓸모를 증명하지 못했다. 달은 내 생각보다도 훨씬 높은 곳에 떠 있었고, 한낱 그림자에 불과했던 나는 그의 망토 조각조차 붙잡을 수 없었다. 꼴사나웠다.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원망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빛나는 저것을, 눈앞에 있음에도 닿지 않았던 달을. 가장 앞에 서 있던 어른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뭐랬어, 검정은 쓸모가 없다니까. 검정, 그것은 나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쓰러져간 형제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 어떤 색도 없는 색. 썩은 과일 하나가 다른 멀쩡한 과일들까지 썩게 만드는 것처럼, 주변을 물들이기만 할 수 있는 색. 부품이 녹슬면 교체하는 것이 당연하듯, 어른들은 무심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도망칠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내가, 그저 부품에 불과한 내가, 밖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허탈함에 고개를 숙이고 최대한 몸을 웅크렸을 때, 눈앞에서 무언가 부서져 내리는 소리가 났다.
“야, 정신 차려!”
달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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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이트 플러시!”
애매하게 보름달이 되지 못한 달이 신경 쓰이는 밤. 두 소년이 어둠이 내려앉은 공원을 가로질러 달리고 있었다. 그들의 뒤로는 수십 명은 족히 넘어 보이는 경비원이 보였다. 그들과 서서히 거리가 좁혀지던 그때, 앞서서 달리던 소년이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곤 품속에서 트럼프 카드를 꺼내 부채꼴로 펼쳤다. 제대로 앞면이 경비원들에게 향하고 있는지 확인한 소년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경비원 몇몇이 그 모습에 일순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나 늦었다. 경비원들이 소년의 행동에 대처하기도 전에, 일렬로 늘어선 카드들이 환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갑작스레 나타난 밝은 빛, 순간적이긴 하나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은 감각에 경비원들이 괴로운 소리를 냈다. 몇 분을 그렇게 보냈을까. 빛이 점점 희미해지고, 서서히 시야가 돌아온 경비원들이 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해냈네여! 쉐도우 씨!”
“응, 근데 이거. 이쪽도 만만찮게 눈부시던데 말이야. 조커는 어떻게 팍팍 쓰고 다니는 거지?”
“조커 씨야, 본인이 발명한 기술이잖슴까.”
“그냥 전부 터뜨려버리면 편할 텐데. 시선도 더 쉽게 끌 수 있을 테고.”
“괴도는 사람을 해치면 안 됨다!”
“예, 예, 알고 있다고. 이쪽은 괴도도 아닌데, 참나.”
두 소년은 무사히 도망쳤고 특이하게 생긴 건물의 앞, 낮게 자란 수풀에 몸을 숨겼다. 경비원들의 기척이 더는 느껴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두 사람이 작게 숨을 내쉬었다. 해냈다며, 작은 소년이 상대를 향해 맑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커다랗고 투명한 빛을 내는 금색 눈망울. 그것과 잘 어울리는 물빛의 옷. 세기의 천재라고 불리는 괴도 조커의 조수, 하치였다. 하치는 주로 조커의 옆에서 그의 일을 보좌하는 역할을 담당했지만, 오늘은 떨어져서 활동하게 되었다. 평소보다 훨씬 많은 경비원과 경찰 인력이 동원되었기 때문이었다. 천하의 조커라도 해도, 백 명이 넘어가는 인원을 전부 커버할 수는 없었기에, 조커는 그들을 효율적으로 분산시킬 작전을 구상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새롭게 동원된 건, 쉐도우라고 불린 소년이었다.
“…뭐, 밥값인 걸로 해둘까. 신세 지고 있으니까.”
“으음, 그치만 주워온 사람이 책임지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함다.”
“어이, 난 반려동물이 아니거든.”
쉐도우가 작게 투덜거렸다. 세세한 차이점이 존재하긴 했지만 마치 조커를 판에 찍은 것처럼 닮은 이 소년은, 근본적으로 조커와 같은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근본, 그래, 근본. 그렇다면 사람의 근본이란 무엇일까. 외형? 사고방식? 가치관? 아니면, 유전자? 당신은 그것들이 복제될 수 있다고 믿는가? 만약 사람의 복제가 가능하다고 했을 때, 우리는 그것은 무엇이라 정의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오랜 시간을 고민했고, 결론을 내렸다. 복제된 인간, 클론. 그것은 이 시대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모르겠다고? 물론, 보통 사람들의 귀에는 공상과학에서나 등장할 법한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곳, 괴도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의 뒤편은 ‘일반적’이라는 개념이 통용되지 않는 곳이었다. 기술력이 나날이 좋아지면서, 윤리를 저버린 몇몇 범죄 조직에서 인체실험을 진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것은 기밀에 부치는 경우가 많았으니.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암암리에 떠도는 소문이 그들의 성공을 점쳤다. 그리고 제아무리 거대한 조직이라도, 그로 인한 피해까진 숨길 순 없었다. 쉐도우는 증거였다. 어느 조직이 저지른 비윤리의 증거.
“하치, 저거 뭐야?”
“아, 수족관임다! 저기도 유명한 관광지래여!”
“저게 수족관, 관광지라….”
무심코 내뱉은 말이었는지, 작게 중얼거린 쉐도우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발걸음을 느리게 옮겨, 건물 입구에 놓여있는 안내문을 하나 꺼내 들었다. 이곳은 해양 생물의 생태와 습성의 연구를 위해 지어진 곳으로, 일반 사람들에게도 공개되는 수족관이었다. 입장권 가격이 제법 있는 편이었지만, 그만큼 다양한 체험장이 준비되어 있다고 한다. 어디 보자, 성인을 기준으로 인당 2만 8천…? SNS에서 인기라는 마스코트도 있고 어린아이들에게도 친화적이라지만, 저건 아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문득 밀려왔다. 그러나 아예 이해가 가지 않는 금액도 아니었다. 이런 연구는, 투자나 지원이 터무니없을 만큼 적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해 허덕이고 있을 가능성도 컸다. 환경 문제는 예로부터 가시밭길이었으니 말이다. 이 시설의 사람들은, 그걸 충당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관광지라는 이름을 빌려 돈을 벌고, 사람이 몰리면 해양 관련 캠페인을 홍보하는 식으로. 쉐도우는 옆에 있던 안내 책자를 집어 들었다. 말없이 그것을 훑어보다가, 하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여기서 박물관까지 얼마나 걸리지?”
“으음, 30분쯤 걸림다.”
“그럼 아까 경비원들이 박물관으로 돌아가도, 조커랑은 마주칠 일 없겠네.”
“그렇겠져? 조커 씨가 박물관에 잠입한 건 2시간 전이니까….”
“응, 이미 벌써 탈출했을지도 모르지. 여기서 기다릴까? 아니면…….”
부스럭 – 무언가가 수풀 속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 아니, 수풀의 움직임을 보아 몸집이 작은 생명체인 것 같았다. 예를 들면 강아지나 고양이, 토끼 같은 동물 말이다. 보아하니 하치와 쉐도우가 숨어있었던 수풀보다도 좀 더 안쪽에 있는 수풀 같았다. 그렇다면 저 동물은, 자신들이 이곳에 오기 전부터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기에는 어딘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조금 전까지는 분명,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동물의 것이라기에는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두 사람은 잠시 미심쩍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순간 무거운 정적이 흘렀으나, 오래 가지는 못했다. 잠시만여, 하치는 수풀을 한 번 더 바라보더니 발걸음을 옮겼다. 전투가 더 능숙한 쉐도우가 나서는 편이 좀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소동물에 약했다. 자세한 이유까지는 말해주지 않아 알 순 없었지만, 마주치면 곧잘 손을 벌벌 떨곤 했다. 쉐도우 본인은 기를 쓰고 태연한 척했지만, 하치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하치는 저것이 정말 동물이라면 쉐도우보다 자신이 나서는 편이 훨씬 났다는 판단을 내렸다.
“하치, 어차피 별것 아닐 텐데. 그냥 조커나 기다리는 편이….”
쉐도우는 수풀을 바라보며 안절부절못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치가 수풀로 들어가고 나서야, 이게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럴 가능성이 작다는 것을 알면서도, 타이밍이 절묘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서, 눌어붙은 불안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쉐도우는 수족관의 팜플렛을 품에 대충 집어넣었고 카드를 몇 장 꺼냈다. 오늘은 본래 사용하던 무기를 들고 오지 못했다. 괴도의 철학이라 포장된 잔소리를 참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무기가 문제라면 네 걸 내놓든가! 홧김에 내지른 말이었는데, 조커는 흔쾌히 수락했다. 출발하기 직전까지 자신을 붙잡고 이것저것 알려주었다. 평소랑 달리 의욕이 넘쳐서, 손끝이 어색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지금도, 제 손끝은 어색하기만 했다. 무슨 일이 생겼을 경우, 내가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까. 뭐, 어차피 조커도 곧 여기로 올 것이다. 자신이 할 일은 시간을 끄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수풀이 있는 화단에 발을 들였을 때, 수풀 속에서 무언가 튀어나와 쉐도우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분명.
연보라색, 의 무언가가….
“….”
“…….”
“로즈…?”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정신을 홀리기라도 했었던 걸까, 기억이 흐릿했다.
기억나는 건, 방금 제 눈앞을 스친 것을 쫓아가야 한다고 말한 다리의 외침.
머리보다는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무조건 반사라고 하던가.
느리면서도 지독하고 끈적거리는 감정의 발작 같았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한 채 필사적으로 그것을 쫓았다.
내 시야에서 그것이 온전하게 사라질 때까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어두컴컴한 공간 속에서 혼자였다.
‘여긴 물속, 인가…. 아, 근처에 수족관이 있었지. 언제 들어온 거람….’
물, 조명이 꺼진 실내를 감싸고 있던 그것은 소름이 끼치는 기분이 들게 했다. 애매하게 시야에 잡힐 정도의 빛 사이로, 커다란 그림자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멀리서 본 한 장의 꽃잎처럼 생긴 것이…. 아마, 물고기일 것이다. 언제였더라. 생명을 얻고 최초로 생긴 기억은 이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창문이 없어 형광등에 의지한 실내, 투명한 유리관, 그 속에 가득 들어있는 물과 그곳에 떠 있는 자신, 그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는 하얀 가운의 사람들까지. 무슨 기분이었더라. 얼마 전까지는, 기분 나쁜 곳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주변에 가득한 어둠, 희미한 빛, 일렁이는 풍경. 이 모든 것이, 지독할 정도로 익숙해서, 지독할 정도로 편안해서. 너는 이곳에 있어야 한다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악몽, 기름을 두르지 않아 진득하게 눌어붙은 달걀 프라이 같았다. 아지랑이처럼 올라오는 탄내에 숨이 막힐듯한, 악몽. 기름이 튄 손끝이 뜨거웠다. 걷어 올린 팔은 차가웠다. 그 기묘한 감각이 편안했다.
‘신기하네, 물속인데 발이 땅에 닿아.’
실제 물속이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으나, 신기한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쉐도우는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펴, 이윽고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이 끝까지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본능은 위험을 외쳤지만, 동시에 어둠이 주는 편안함에 안주하고 싶다고도 말했다. 쉐도우는 이것을 ‘신기하다’라는 단어로 얼버무렸다. 그는 이렇듯, 곧잘 자신이 느끼는 감각을 착각하곤 했다. 감각이라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탓이 컸다. 그러나 그만큼 예민하기도 했다. 쉐도우의 전투 스타일은 본능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다. 위험할 것 같은 느낌이 들면 피하고, 그렇지 않으면 무시하는. 비어있는 머리를 본능적 감각으로 채워, 살아남은 것이다. 머리를 쓰는 것이 서투르니, 환경이 되지 않는 배움을 버리고 최대한 단순한 걸 선택했다고 보는 게 옳았다. 그렇기에 감각을 활용할 줄은 알았으나,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마주 볼 줄은 몰랐다. 눈치와는 별개의 영역이었다. 이리저리 쉽게 휩쓸릴 만큼, 세상을 처음 마주한 어린아이 같았다. 쉐도우는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 그러고 보니, 조커 녀석은 어떻게 됐지?”
“그러게나 말이야, 계속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길래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 아, 뭐, 으응? … 하, 하아!? 조커!? 언제부터 있었어?”
“글쎄, 15분 전부터?”
예상하지 못했던 목소리가 돌아오자, 쉐도우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몸을 크게 움찔거리며, 제 옆에 태연스레 서 있는 상대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궁상떠는 것도 봤으려나. 얼굴에 순간 열이 몰렸다. 차마 입을 다물지 못해 버벅거렸다. 손이 공중을 배회했다. 어둠 속에서도 그 빛을 잃지 않은 은발, 코발트 빛의 깊은 눈동자. 그 속에 어려있는 장난스러움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상대는 출구가 있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려 앞장섰다. 쉐도우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뒤를 따랐다. 자신은 하치를 두고 개별행동을 했다. 그러고서도 바로 복귀하지 않았다. 질책받아도 마땅한 행위였다. 그러나 쉐도우 자신은 조커의 조수가 아니었다. 자신의 의지로 그에게 붙어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부분이 면죄부로 작용한 걸지도 모르겠다. 아님 말고. 아무튼 조커는 크게 그를 질타하지 않았다. 그저, 함정이면 위험했다고 한마디 덧붙일 뿐이었다. 쉐도우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에 쉐도우는 시선을 돌리며, 말을 꺼냈다.
“그, 그건 그렇고. 여기 상당히 이상하지 않냐?”
“이상하다니, 어느 부분이?”
“지나치게 조용해. 연구시설을 겸하고 있다면 더욱, 이곳에 사람이 없을 리가 없어. 하다못해 경비원이라든가, 야간 근무하는 직원이 한둘 정도는 있어야 하는데.”
“그걸 아는 놈이 출구랑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
“….”
“빨랑빨랑 빠져나올 생각을 해야지.”
“그러게.”
본전도 못 찾고 고개를 끄덕인 쉐도우는, 저 멀리 출구에서 들어오는 빛에 눈을 찡그렸다. 어둠 속에서는 그 아무리 작은 빛이라도 빛을 낸다. 그게 싫었다. 거슬린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자신은 노력해도 빛날 수 없는데, 왜 그들은 이리도 쉽게 빛이 나는가. 앞에서 걸어가던 조커의 모습이 역광을 받아 검게 흐려졌다. 그러나 집어삼켜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둠을 제 무대로 삼는 사람, 하늘을 자유롭게 유랑하는 사람. 닿을 수 없는 달, 제 뒷면이자 제 천적이었다. 그를 보면 한계를 느낀다. 한때는 그것이 무척이나… 꺼림직했지. 느려진 발걸음이 차가운 밤바람에 스러졌다. 이젠, 다 부질없는 이야기네. 그렇게 믿고 싶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가십지처럼, 가벼운 추억으로 소비하고 싶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보인 것은 별이 무수한 하늘. 그리고 보름달이 되지 못한 달. 흘러가는 구름. 그것이 아름답다고 느낀 건 언제부터였을까. 원망스러운 뒷모습에 아련한 동경을 느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 그냥, 아무것도.”
“에에, 아무것도 아닌데 말 못해? 그럼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
“그렇네, 지나가는 개미에게라면 말할 수 있을지도.”
“아? 나, 개미보다도 못하는 거야?”
“비슷해.”
“너무하네!”
조커가 상처받은 표정을 과장되게 지어 보였으나, 쉐도우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이에 자존심이 단단히 상한 모양인지, 조커가 보란 듯이 근처의 화단을 이리저리 노려보기 시작했다. 하여튼 유치하다니까, 옅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조커가 소중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친한 사이일수록 말하기 어려운 일도 있는 법이라고 생각하니까. 괜히 걱정 끼치고 싶지는 않다고 말하는 게 정답일지 모른다. 아직도 과거로 궁상이나 떠는 걸 조커가 알면, 분명 신경 쓸 테니까. 자신은 이제 아무렇지도 않은데.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데. 쉐도우는 눌어붙은 감정의 원인이, 몸이 적응하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확신했다. 지금까지와는 환경이 너무 달라져서,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흘러가는 구름처럼, 스쳐 가는 바람처럼. 오늘 있었던 헤프닝은 금방 잊힐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티를 낼 필요가 없지. 이제 능숙하게 지을 수 있는 웃음으로 밀려오는 어색함을 가렸다.
이제는 집에 갈 시간이었다.
“다리를 다친 고양이가 있던 거 있져?”
“힉, 고양이!? 거기 고양이가 있었어?”
“조용히 해 조커. 그래서, 치료해주고 돌아왔더니 내가 없었다고?”
“네, 찾으러 갈까 고민했는데, 때마침 조커 씨가 와주셔서 다행이었슴다.”
비행선으로 돌아온 뒤에는 평소와 같았다. 샤워를 끝내고 다 함께 둘러앉아, 조커의 과장되고 장황한 무용담을 들으며 저녁을 먹는다. 옅게 느껴지는 얼얼한 매운맛이 혀끝에서 감돌았다. 그러나 불쾌한 매운맛은 아니었다. 이후 설거지와 빨래가 끝나면, TV를 보며 실없는 이야기를 나눈다. 평화는 단조로움의 연속이라고 누가 그러던가. 평생 이런 일상이 기다리고 있다면, 이곳에 취해 잠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을 노래하는 한 편의 희극처럼. 아, 희극보다는 인형극이라는 이름이 더욱 어울릴지도 모르겠네. 곱게 개어진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기며, 우리는 서로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넸다.
밝은 복도를 지나 도착한 방은 서늘했다. 단정함이 되레 무미건조함을 일으켰다. 열린 커튼 사이로 달빛이 그대로 쏟아졌다. 그림자가 일렁이고, 푸른 빛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오늘 본 수족관 같네, 라고.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뭘까, 이 감정은 뭘까. 요즘은 무엇을 해도 이상한 기분만 들었다. 기묘하다고 표현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이대로 잠겨버렸으면 좋겠다던가, 자고 싶다거나. 이름 모를 위화감에 시달리다가도, 멍하니 그것에 시선을 던지고, 정신을 차려보면 개별행동을 하고 있었다. 내 삶이 내 삶이 아닌 것 같은 기분도, 드문드문 들었다. 그건…. 역시 내가 실패작이라서 그런 걸까. 슬슬 고장이 날 때가 온 걸까. 이따금 방에서 블러디레인이나 블랙스피더를 수리하고 있노라면, 나 자신 역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떠오르곤 했다. 내가 좀 더 제대로 만들어졌다면, 제대로 살아갈 수 있었을까. 말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자책은 물이 밀려오는 것처럼 들어왔다. 그러다가 살아남은 건 끝내 나뿐이라는 사실이 상기되어서. 그걸 위안으로 삼았던 기억이 있다. 형제의 죽음이 위안이 되다니. 나는 이기적인 걸까. 아, 어지럽네. 이럴 땐,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싶었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올 사람이 없을 텐데. 그런 생각과 함께 쉐도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놀란 듯한 표정을 짓는 쉐도우를 보며 조커는 태연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다른 손에는 음료수랑 과자가 가득 들려있었다. 펑퍼짐한 노란 옷이 하늘하늘 흔들렸다. 일할 때 보여주는 여유로움과는 다른 여유가 그에겐 있었다. 그것이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분명. 쉐도우가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는 듯싶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며 손짓했다. 들어와도 좋다는 뜻이었다. 이에 조커는 환하게 웃으며 바닥에 과자를 깔기 시작했다. 음정을 당최 알 수 없는 경쾌한 콧노래와 함께 입이 열렸다. 둘 중 먼저 말을 꺼낸 쪽은 조커였다.
“이 시간까지, 안 자고 뭐 해?”
“남이 자든 말든, 어차피 난 안 자도 안 죽어. 너야말로 이 시간까지 무슨 일이야?”
“나도 안 자도 안 죽어서.”
조커는 저주에 걸렸다고 했다. 죽지 않는 저주라나 뭐라나. 무슨 사고를 쳐서 얻은 저주인지는 몰라도, 사람들은 그것에 열광했다.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는 저주도 아니었기에. 저주나 불로불사나 그게 그거,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런 멋진 저주를 누구에게 받았을까, 자신에게로 옮길 수는 없을까. 분해하면 원리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사람들은 조커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조직 내부의 분위기를 떠올리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사냥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만약 자신이 그의 저주까지 복제된 채로 태어났다면,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실험대 위에서 평생 내려오지 못하는 삶을 살았겠지. 조커도 쉐도우도, 인간의 추악한 일면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강하게 부정했다. 쉐도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제가 바라보는 조커는 누구보다 인간적인 사람이라고. 걸핏하면 늦잠을 자서 하치에게 혼나고, 좋아하는 음식도 많아 쉬는 날에는 꼭 군것질을 했다. 게임 하나에 울고 웃기도 하고, 눈에 띄고 싶어 하고. 요리라든가, 못 하는 것도 있고…. 신기할 정도로 감정에 있어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마음대로 표출하기도 하고, 적절하게 제어하기도 하고. 그런 모습을 곁에서 보고 있으면, 무심코, 그 속에 녹아들고 싶다고, 생각해버리고 만다.
“너, 고민 있지?”
“… 뭐래, 고민은 무슨.”
“거짓말, 날 속이려면 백 년은 이르다고?”
“그니까 뭔 소리야. 그래, 넌 늙어서 좋겠다.”
둘은 자리를 잡고 앉아 과자 봉지를 뜯었다. 하나, 둘, 셋, 넷…. 하치가 알면 기함을 토할 양이었다. 저녁 먹은 지 얼마 안 되지 않았나? 쉐도우는 투덜거리며 잔에 음료수를 따랐다. 조커가 웃으며 괜찮다고 과자 봉지를 평평하게 깔았다. 이미 양치를 끝낸 탓인가, 입에서 강하고 찝찝한 신맛이 느껴졌다. 조커는…. 반응을 보아하니 양치를 아직 하지 않는 듯싶었다. 이러니 항상 잔소리를 듣지. 쉐도우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박하와 오렌지는 생각만큼 잘 어울리지는 않는 것 같아 - 라고 할까. 사실 치약의 박하와 음식에 쓰는 박하는 향부터 맛까지 큰 차이가 있다. 알고는 있었지만, 지금 당장 입에서 느껴지는 신맛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쉐도우는 미묘한 표정으로, 미묘한 상쾌함을 없애려 과자를 하나 더 입에 집어넣었다. 조커는 그런 쉐도우를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기분이 가라앉아 있잖아.”
“내가? 언제?”
“글쎄, 정확히 말하자면… 으음, 여기에 처음 오고 나서부터?”
“그건, 아니야.”
단호했으나 말이 무겁게 떨어졌다. 비수에 깊게 찔린 것처럼 온몸이 아려왔다.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던 사실을 끄집어내 만천하에 드러낸 기분. 부정은 했지만 사실, 그의 말이 맞을 것이다. 조커의 권유로 이곳에 정착한 후부터 감정은 점차 차분해져 갔고, 쉐도우는 자신을 남처럼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사회성을 기르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주변인과 어울리는 법을 배우고 있는 것이라고. 잘못된 것 같다고는 느꼈지만, 어디가 잘못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럼 맞게 가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러나 정작 조커에게 있어, 쉐도우의 그런 변화는 썩 달가운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 그러네. 잘 생각해보면…. 어쩌면 나는, 분리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조직에 몸담고 있던 시절의 나와 끝내 탈출에 성공한 지금의 나를, 타인이라고. 전부 버리고 새출발하고 싶다고, 그러나 그럴 수 없었던 것뿐이라고. 그러니 핑곗거리를 대며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온전하게 끊어낼 수 없었다. 무의식이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두 마리의 토끼를 전부 잡을 수 없다면, 한 마리는 보내줘야 하는 법인데. 나는 왜 아직도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가.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나는 없었다. 몇 번을 죽고 태어나도, 앞으로도,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나 자신과 마주 본다는 건, 꽤 고역이었다. 막연하게 느껴지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러니 조용히 해줘. 이대로 잠기게 해줘. 그런 감정이 스미는 이유는 무엇일까.
“처음에는 익숙해지고 있구나, 했었는데. 보면 볼수록 이상해서 말이야. 너, 진짜 모르겠어?”
“뭘?”
“난, 무심코 가슴이 답답하다거나, 영원히 눈을 감고 싶다거나.”
“아니, 그런 적….”
“지금이 어딘가 멀게 느껴진다거나, 제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거나.”
“….”
“그런 적 없냐고 물어보는 거야.”
그거야 간단했다.
아직 아무것도 끝난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뭐, 조직이 괴멸한다고 행복해지진 않겠지. 복수를 삶의 목적으로 삼을 생각은 없다. 그러나 알고 있었다. 복수를 한다면, 마음은 한결 가벼워질 것이란 걸. 그렇기에, 어느 한쪽이 확실하게 우위에 올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럼 편해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꽤 많은 정신력을 요구했다.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는 건, 생각 이상으로 고통이었다.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지금의 나에겐 그럴 힘이 없다는 것. 애초에 개인이 조직을 상대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조커와 하치를 끌어들이는 건, 역시 싫었다. 도와달라고 말한다면, 도와줄 사람들이란 걸 알고 있다. 그렇기에 더더욱 말할 수 없다. 그들은 충분히 휘말렸다. 그리고 지금의 일상을 깨버리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필사적으로 외면했다. 분리하고픈 마음은, 그곳에서 비롯했으리라 생각한다. 아니면, 마땅한 해결책 하나 낼 수 없는 나 자신을 인정할 수 없었다던가. 뭐, 인제 와서 이유야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저, 그럼에도 마치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처럼, 내게 주어진 이 자유가, 신경 쓰였다. 내가 정말로, 이걸 받아도 되는 걸까. 받아서 안 될 선물을 받은 어린이가 된 기분이었다. 머그컵을 잡은 손이 옅게 떨렸다.
게다가 문제가 그것뿐이라면, 그냥 눈을 가리고 살아가면 그만일 테지. 내가 정말로 참을 수 없었던 건, 피어오르는 열등감과 패배감. 동경심으로 억눌러왔던 더러운 감정들. 그것들은 이따금 고개를 들었다. 몇 년을 너만 바라보며, 그렇게 살았다. 너를 뒤쫓으며 너의 자리를 탐냈다. 아무도 내게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위해 태어난 거였으니까. 오히려 응원을 해줬으면 해줬지, 그 인간들은. 젠장…. 마지막에 버려지더라도, 1초라도 더 숨을 쉬고 싶었다. 그건 흔적이었다. 내가 필사적으로 너를 원망했었다는 흔적. 이제 더는 필요 없을 흔적. 그래서 더욱, 나는 그것들을 나로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지우고 싶었다. 겨우 안주한 일상이 무너져버릴 거야. 그게 두려웠다. 나는 네가 나를 바라보는 그 눈이, 변치 않기를 원한다. 그렇기에 지워야 했다. 너에게 가졌던 모든 더러운 감정을, 과거의 내가 네 발목을 이 이상 잡지 않도록. 그리고 네가 만든 평화 속에서, 지금의 내가 살아갈 수 있도록. 그렇다면, 필히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가 버린 나는 어디로 가게 될까? 나는 정말로 나와 타인이 될 수 있을까?
…
너는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걸까.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이해를 전혀 못 하겠는걸. 요즘은 평화로워서 좋다고 생각은 했지만.”
“괴도가 편하면, 큰일이라는 의미라던데.”
“누가 그래?”
“스승님. 그러고보니, 하고 싶은 일이라든가 찾았어? 취미라든가, 들은 적 없네.”
“글쎄.”
조커가 남은 과자를 입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쉐도우는 조커의 컵에 남은 음료수를 털어 넣어주며 씁쓸하다는 듯 말했다. 글쎄, 취미…. 취미라…. 그러고 보니 그런 걸 찾겠다고 했었던가. 뭐, 이래저래 복잡한 감정들을 제쳐두고서라도…. 나는 너에게 미안함을 느낀다. 나라면 역겨웠을 것이다. 타인이 제멋대로 만든 자신의 복제품 따위. 인간들이 저지른 욕심의 증거 따위. 끝내 손을 내밀었음에도 너에게 품은 원망을 거두지 않았던, 가증스러운 가짜 따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 입장이 어떻든, 별개로 말이다. 네가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기겁하겠지. 아니라고 부정하고, 당황스러운 얼굴로 손을 내저을 것이다. 앗, 그건 좋을지도, 널 날 짓궂게 만든다. 짓궂다는 단순한 말로 설명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감이 있겠지만, 무튼 그렇다. 넌 계속해서 그 손을 뻗어나갈 것이다. 그런 것이 당연한 사람이니까. 생명은 소중하니까. 달밤의 높은 곳에 서서, 밝게 빛을 내며, 전부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희망 고문 같아. 하지만 고문 따위가 아니란 걸 알아서, 더욱. 아아, 갑자기 기분 나빠.
“조커.”
“응?”
“밤하늘 보는 거 좋아해?”
“글쎄에~.”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보면 항상 느꼈다. 나 같은 건 아무리 빛을 내고 닦아도 행복해질 수는 없다고. 그렇다면 차라리 자고 싶다고. 물속에서는 온전한 행복을 찾을 수 없으니까. 빛에 이끌려 물속에서 뛰쳐나왔는데, 아직도 수면 깊은 곳에 갇혀있단 기분이 들었다. 이곳은 밝은데, 따뜻한데, 퀘퀘한 냄새도 나지 않는데. 올려다본 밤하늘이 일렁였다. 수면처럼 일렁였다. 밤은 물과 다를 바가 없는 걸까. 이대로 눈을 감으면, 다시는 달을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다면, 외면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나는 손을 뻗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난 정말, 이중적이구나, 들키고 싶지 않아. 들키고 싶지 않아. 너는 알고 있을까? 수면 아래가 얼마나 지독한지? 추악한지? 하지만 편안한지? … 아, 또 시작이다. 숨겨야 해. 제대로 숨기지 않으면 안 돼. 이걸 들키면 네가 날 경멸해줄까. 그렇다면 차라리…. 아냐, 아니지.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쓸데없는 생각을 했네.
조커는 달만큼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휘어진 눈꼬리가 아름다웠다.
응, 아주 좋아해.
“쉐도우.”
“응?”
“이번 여름엔, 수영장 어때?”
그 말이 유달리 담담하게 느껴졌던 건 착각이었을까. 쉐도우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여, 조커의 어깨에 기댔다. 나, 졸려. 나지막이 중얼거린 그 말에 조커가 픽 웃어버렸다. 안 잘 것처럼 말하더니? 죽지 않는다고 했지, 안 잔다고는 한마디도 안 했어. 쉐도우는 한 박자 늦게 목소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그게 그거잖아. 조커는 다 먹은 과자 봉지를 동그랗게 뭉쳐 쓰레기통에 던져 넣기 시작했다. 몇몇 공이 쓰레기통의 끝을 아슬아슬하게 돌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조커가 탄식하는 소리가 들린다. 하긴, 일류 괴도가 공 하나 제대로 못 던졌단 건 우스운 일이지. 그런 생각과 함께, 쉐도우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는 밤하늘이 수면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
“좋은 표정 하고 있잖아. 더 좋은 소식 알려줄까?”
꿈을 꿨다. 오랜만에 보는 풍경. 주변은 조용했다. 차가운 바닥과 벽, 녹은 철 냄새가 진동하고 달빛마저 제대로 닿지 않는 좁은 방. 구석에 앉아있던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무릎을 끌어안았다. 또 져버렸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그거였다. 나는 왜 살아있게 된 거더라. 그것을,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보고 깨닫는다. 나는 너와 다르다는 사실과 함께. 검은색, 역겨울 만큼 칠흑 같은 검은색. 은발이 아니야. 너와 색이 다르다는 건, 실패라는 증거였다. 내가 반쯤 완성된 날 어른들은 내 목에 손을 댔다. 숨이 막히는 감각, 아득해지는 시야. 본능적으로 상대의 손을 잡았다. 뜯어내려고 했다. 실패했지만. 그래서 발을 썼던가. 복부를 걷어차고 손으로 땅을 짚었다. 흐리지만 시끄럽게 들리는 수많은 목소리 사이, 선명하게 들린 그것은 -
탕, 단말의 총성.
실험용 유리관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관통당한 어깨에서는 피가 솟구쳤다. 몸이 휘청였다.
유리 위로 넘어졌다. 팔다리 이곳저곳이 쓸리고 베였다. 유리 파편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머리를 잡혔다. 컥, 뱉어지지 못한 숨이 넘어갔다. 목덜미에 서늘한 감각이 닿았다. 그것의 방아쇠가 당겨지기 전, 날카로운 유리가 상대의 살을 찢었다. 어디를 노렸었더라. 팔을 잘랐던가. 목을 찔렀던가. 상대는 비명을 질렀다. 주변 사람들이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미미하게 따뜻한 붉은 액체가 손가락을 타고 흘렀다. 나는 목을 어루만지면서 생각했다. 방해, 라고. 몇 분, 아니 몇 시간이 그렇게 흘렀을까. 연구실의 문이 열렸다. 비릿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벽과 바닥은 검붉은 피가 진득하게 눌어붙어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구석으로 밀어두고, 방 한가운데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있었다. 지금처럼. 나는 그렇게 완성됐다. 이윽고 문을 열고 들어온 상대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이걸 다 언제 치운담. 연보랏빛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화, 안 내? 내가 물었다. 상대가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너에게 화를 왜 내. 무서웠지? 이리 와. 몸을 덮은 피보다 따뜻했던 그 품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도망치지 못했다.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훗날 프로페서는 그렇게 말했다. 갓 태어난 아기가 걷는 모습을 본 놀라움이었다고. 내가 처음이었단다. 죽음을 죽음으로 되돌려준 인형은. 아무 반항도 하지 못하고 죽었어야 맞는, 인간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반쪽짜리 무언가가, 제 본능만 믿고 살인을 저질렀다. 그리고 성공했다. 그것이 높게 평가된 모양인지, 실패작 중에서는 이례적으로 작전에 투입될 수 있었다. 무기를 다루는 법을 배웠고, 사람의 급소가 어디인지 배웠다. 은폐를 어떻게 하는지도 배웠지만, 그건 많이 써본 적은 없었다. 누군가는 그것이 ‘살아가는 데 있어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내가, 그림자가,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이번에도 지면, 폐기하겠대.”
“뭐…?”
“축하해, 네가 이겼어.”
그날, 네가 지었던 표정을 기억한다. 도로 곳곳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서로의 모자가 바닥에 떨어졌다. 끝부분은 닳아있었다. 작은 불꽃이 사방에서 튀었다. 손끝에서 느껴진 갈라진 콘크리트는 생각보다 거칠었다. 눈앞에는 주저앉아있는 내가 있었다. 잿더미가 묻은 하얀 장갑, 바닥에 늘어진 망토. 그것을 깨닫고 위를 올려다보았을 때, 너와 눈이 마주쳤다. 너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그러나 그럴 일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고하게 서서, 빛을 받으며 서서, 무기를 내게 겨누었다. 나는 이때 내 손은 비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얼마 되지 않은 곳에 널브러진 우산이 꼭, 나 자신 같았다. 무엇이 너를 이토록 강인하게 만드는 걸까. 나는 무엇이 부족했던 걸까. 왜 너를 이기지 못하는 걸까. 수만 수천 번을 고민해도 알아낼 수 없었다. 그림자는 빛이 될 수 없었기에. 나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축하해, 지긋지긋한 그림자에게서 벗어나게 된 걸 축하해. 너는 표정을 구겼다. 그 모습에 강한 희열을 느꼈다. 그 희열을 잊고 싶지 않아서, 닫힌 입에서 나올 말이 무서워서, 네가 입을 열기 전에 땅을 짚고 도망갔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발악이었다.
“나는 결국 너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 거구나.”
방 안에 있으면 느낀다. 나는 네 도움이 되지 못했노라고. 네가 내 죽음에 눈물을 흘렸으면 좋겠다. 하지만 상처받지 않았으면 해. 나 같은 건 낡고 닳아 버리는 인형 정도로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하지만…. 모순되는 감정이 섞여가는 순간, 다가오는 죽음은 공포가 될 수 없다. 다음에 태어날 녀석은 은발일까. 그렇다면 나보다 훨씬 도움이 되겠지?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을 그 녀석은 해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조커, 그 녀석도 그렇게 느낄지 몰라. 저 녀석이야말로 완벽한 그림자, 라고. 낡은 기계 부품을 갈아 끼우듯,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나보다 더 불쾌해하겠지. 기묘함을 느끼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허탈하네, 그래, 이게 허탈하다는 감정이구나. 손도 발도 차갑다. 눈도 무겁다. 간수들이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열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처분이 결정된 모양이었다. 끝은, 죽음은 어떤 느낌일까. 기계에 전류를 멈추듯이, 온 세상이 물에 잠기듯이, 어둡고 편안하고 조용했으면 좋겠다. 그건 욕심일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밖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들렸다.
“무, 무슨 일이야!?”
“괴도다! 괴도가 나타났다!”
“서쪽으로 간다! 잡아! 저거 잡으라고!”
“불길부터 어떻게 해! 주변이 숲이라 옮겨붙으면 답도 없다고!”
폭발? 갑자기? 나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쇠창살이 끼워져있는 조그마한 창문. 추위에 몸이 굳어 일어나지는 못했지만, 저 멀리 연기와 함께 붉은 것이 일렁이는 게 보였다. 간수들이 당황해하는 소리가 들린다. 간수뿐만이 아니다. 이 성 전체가 혼란에 휩싸여있었다. 어쩌면 이건, 하늘이 내려준 기회일지도 모른다. 도망칠까, 누구도 찾지 못하는 곳으로 도망칠까. 숨을 죽이고 살면, 살면…. 나는 이윽고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살아서 뭐, 어떻게 할 건데. 이루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나에겐 없었다. 밖에 대한 동경도, 호기심도, 예전에 죽였다.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내가, 그저 부품에 불과한 내가, 밖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허탈함에 고개를 숙이고 최대한 몸을 웅크렸을 때, 눈앞에서 무언가 부서져 내리는 소리가 났다.
문득 느껴지는 바람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야, 정신 차려!”
달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깊은 맑은 코발트 빛, 그게 아름답고 또 아름다워서, 나는….
나는….
“다행이다, 살아있어.”
“…조커, 왜…?”
“왜냐니? 생명은 소중한 보물이잖아.”
“아니, 하지만 나는, 사람이….”
아닌데. 나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하지만 조커는 그 말을 이해한 것 같았다. 조커는 천천히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어딘가 안도하고 있는 표정이 기분 나빴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아니잖아. 그 속마음을 부정하듯이, 조커는 내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내 상태를 살피려는 듯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묘한 기분에, 나는 팔을 치웠다. 그러자 조커는 내 팔을 잡았다. 그리고 옷을 걷어 올렸다. 멍이 가득한 팔을 내려다보며 조커가 인상을 찌푸렸다. 전언 철회다, 안도하는 표정보다 걱정하는 표정이 더 기분 나빴다. 이렇게까지 사람을 불쾌하게 하는 것도 재능인데. 그러나 이건 불쾌감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는 감정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걱정시켜서 미안하다, 정도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당시의 나는 이 감정에 이름을 제대로 붙이지 못했다. 조커와 나는 그런 안부를 주고 받는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나는 다리를 가리기 위해 옷을 아래로, 아래로, 잡아당겼다. 조커는 그 모습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 망토를 벗어 둘러줄 뿐이었다. 입고 있는 옷만큼 얇은 것이었는데, 어쩐지 따뜻했다. 하지만 눈을 제대로 마주칠 수는 없었다. 내 치부가 온 세상에 드러난 기분이었다.
“멍청아, 잘 들어.”
“네가 사람이 아니라면, 나도 사람이 아니야.”
“하지만 난, 사람이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던 내게, 조커는 그렇게 말했다. 한 단어, 한 단어, 힘을 주며 말했다. 조커는 저주에 걸렸다고 했다. 죽지 않는 저주라나 뭐라나. 무슨 사고를 쳐서 얻은 저주인지는 몰라도, 사람들은 그것에 열광했다. 그래서 내가 태어났다. 그를 온전하게 연구하기 위해서. 네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져서 인간이라 불릴 수 없다면, 죽음에서 벗어난 나 역시 인간이라 부를 수 없어. 너는 그렇게 말했다. 아니다. 너는 인간이다, 내가 동경에 마지않았던 인간이다. 그렇다면 나도 인간인가?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떨렸다. 손이 떨리는 건지 발이 떨리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온몸을 떨고 있었을지도. 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런 나를, 네가 안아주었다. 도망가자, 네가 나에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웃으며 일어났다. 그리고 날 일으켜 세웠다.
“잡아!”
“꼼짝 마, 괴도!”
벌컥 - 그때, 방의 문이 열리고 몇 명의 조직원들이 총을 겨누었다. 어떡하지? 때려눕혀야 하나? 맨몸으로 몇 명까지 상대할 수 있지? 중간에 무기를 뺏으면…. 내가 방으로 들어오는 조직원의 수를 가늠하고 있을 때, 조커는 내 팔을 잡아당겼다. 무의식적으로 앞을 향하던 발이 뒤로 밀렸다. 발이 꼬였다. 몸이 휘청였다. 왜? 나는 조커에게로 시선을 돌리다 깨닫는다. 조커가 발을 내디딘 그곳이, 하늘이란 걸. 벌룬껌은 안 된다. 총에 맞고 터져버릴 가능성이 컸다. 그걸 조커가 모를 리가 없었다. 일류 괴도가 그런 것 하나 계산하지 않았을 리가 없잖은가. 믿는다. 믿는데, 어떡하려고? 나는 본능적으로 조커의 옷을 꽉 잡아 쥐며 소리쳤다.
“잠, 깐!?”
“하치!”
성에 커다란 그림자가 진다. 거센 바람이 나무들을 흔든다. 조커는 사다리를 잡고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비행선이 보였다. 비행선은 빠른 속도로 찾아와, 빠른 속도로 나아갔다. 몇몇 조직원이 방아쇠를 당겼다. 그 앞을 가로막은 건, 생각보다 강한 바람이었다. 비행선이 지면과 상당히 가까워서 가능한 일이었다. 총알이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불을 진압하라고. 바람 때문에 불씨가 날아간다고. 이곳저곳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조직의 규모를 생각한다면, 금방 진압할 수 있을 것이다. 폭발의 원인은 당돌하게 웃었다. 불이 번지는 속도, 사람들의 움직임 등을 계산해서 일으킨 폭발이니 괜찮다는 말을 속삭여주었다. 소름이 돋을 만큼 무서운 치밀함이었다. 비행선은 그렇게, 꽤 오랫동안 밤하늘을 날았다. 조커가 허리를 단단히 잡아 왔다. 추위가 몸을 타고 옷 속까지 파고들었지만, 그것마저 잊게 만든 풍경이 그곳에 있었다. 맑고 광활한 밤하늘이 아름다웠다.
“이거… 어떡하냐?”
“침대로 옮기자니 중간에 깰 것 같고, 내버려 두기에는… 어깨가….”
잠든 쉐도우를 바라보며 조커가 중얼거렸다. 무슨 꿈을 꾸는 건지, 쉐도우는 이따금 희미하게 제 이름을 불렀다. 이름 부르는 건 반칙이지! 조커는 속으로 생각하며 머리를 짚었다. 그리곤 이내 턱을 받치고 창문을 바라보았다. 닫히지 않은 커튼 사이로 달빛이 들어왔다. 언제였더라. 삶의 이유가 없다고, 울며 제 스승에게 매달렸던 때가. 스승님은 알려주셨다. 뒷세계에서도 빛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그것을 동경하고, 동경하고, 동경했다. 영생을 얻은 뒤, 처음으로 무언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품었다. 도심의 엔터테이너라고 불리고 있지만, 괴도도 일단은 범법자. 더는 햇빛 아래에서 살아갈 수 없어졌다. 그러나 밤하늘 아래에서 가장 빛나는 이 순간이, 나는 참 좋았다. 이제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자고 결심했다. 그것이 지금의 나. 그러나 쉐도우를 보고 있노라면 과거의 자신이 떠올라서 참을 수 없었다. 길을 잃은 자신에게, 지금의 나는 행복하다고 외치고 싶어서. 그렇게 과거의 아픔에 대한 위안을 얻고 싶어져서. 쉐도우라면, 화를 낼 것이다. 사사로운 감정에 자신을 이용하지 말라고. 그런 거 싫어하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들키고 싶지 않은, 하지만 들켰으면 좋겠는 모순적인 무언가가.
“내 이기심일지도 모르겠지만, 너도….”
나는 네가 조금 더 이기적이었으면 좋겠다. 내 자리를 뺏어서 행복해질 수 있다면, 과감하게 뺏으러 와줬으면 좋겠고. 지금이 좋다면 평생, 이 애매한 평화를 연기해줄 수도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눈길이 가는, 이 감정의 이름을 너에게 토로할 수 있다면. 처음에는 귀찮았고, 꺼림칙했다. 복제품이라니, 솔직히 그렇잖은가.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지긋지긋하다고. 늘 있던 인간들의 질 나쁜 장난이라 여겼다. 그러나 몇 번이나 마주친 눈 속에 담긴 올곧음에, 문득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웃고 울고 화내는 너도, 인간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동시에 어린 나와 마주쳤다. 끌어내고 싶어, 달빛 아래로 끌어내고 싶어. 그러나 그럴 수 없다. 네 행복은 이곳에 없잖아. 그걸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지금이 불안했다. 너는 언제든지 저 멀리 날아갈 것만 같았다. 왠지 씁쓸하네. 빛이라더니, 그림자라더니. 부질없잖아, 그런 거. 네 눈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즈, 그곳에는 그렇게 중얼거리는 네가 있었다. 그녀와는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눈에 스며든 것은 선명한 애정.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사정상 잠시 떨어져 있지만, 쉐도우와는 가족 같은 사이로 지냈다나. 쉐도우를 상대로, 가족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꺼낼 수 있다는 점이 신기했다. 그만큼 신뢰가 있다는 뜻이겠지. 마녀는 쉽게 사람에게 정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쉐도우에게 분명한 애정을 줬다. 그리고 당시의 쉐도우에게 있어 그건, 구원줄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이른바 정신적인 지주, 라는 거지. 나로서는 허락되지 않은 공간이, 쉐도우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것이 자못 불쾌했다.
“나만큼 행복했으면 좋겠어.”
사람이면 당연하게 누릴 수 있는 것들, 우리도 당당하게 누리면서 살자.
네 등을 밀면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이 전부였다. 네가 날 의지하지 않으니까. 치사하네, 장난스럽게 표현하자면 짝사랑만큼 외로운 건 없다던데. 조커는 자신에게 기대는 쉐도우에게 기대며, 슬며시 눈을 감았다. 발을 타고 올라오는 추위에 정신은 또렷해졌지만, 어깨에 닿은 온기가 따뜻해서. 왠지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을 꾸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만큼 푹 잘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밤이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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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도우는 밀려오는 햇빛에 눈을 떴다. 바닥이 보였다. 아, 그대로 잠들었나 보네, 하는 단순한 생각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바닥과 닿아있던 다리가 꽤 차가웠다. 굳어버린 근육과 찌뿌둥한 몸을 견딜 수 없어 기지개를 켠 순간이었다. 옆에서 희미하게 앓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무슨 일인가 싶어 옆을 바라보니, 조커가 팔과 어깨를 부여잡고 있었다. 살짝 찡그린 표정으로, 바닥에 앉아서. 설마…. 밤새 그러고 있던 거야? 쉐도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부끄러움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쉐도우는 버벅거리며 갈 곳을 잃은 손을 내저었다. 지금 몇 시지? 나, 몇 시간 동안 이렇게 붙어있던 거야? 손목을 바라보았으나 시계는 없었다. 당연했다. 지금은 잠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그곳에 숨고 싶었다.
“뭐, 뭐, 뭐야!? 너, 방에 안 갔었어!? 잠은!?”
“누구 씨 덕분에 못 갔지. 와, 어깨 결려 죽을 것 같아~.”
“윽.”
“안마해주면 풀릴 것도 같은데?”
“힘 조절 못하는 거 알면서…. 아, 3개월 정도 누워있으면 피로가 풀리긴 하겠네.”
“아니, 어이. 남의 어깨, 그렇게 가볍게 박살 내지 말라고.”
“농담, 농담.”
쉐도우가 조커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조커는 제 어깨를 붙잡고 한 걸음 물러났다. 쉐도우라면 가능해, 절대로 가능해!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쉐도우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조커에게 달려들었다. 으악! 조커의 비명이 방 안을 가득 울렸다. 조커가 미처 일어나지 못하고 뒤로 넘어갔다. 조커는 손으로 쉐도우의 손을 막아냈다. 쉐도우가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원하는 대로 주물러 준다니까 그러네! 필요 없어, 저리 가! 어쩐지 필사적인 손길이었다. 평소라면 절대 해주지 않을 안마지만, 경쟁이 붙어버리면 왠지 해주고 싶다는 게 그 이유였다. 물론 조커는 그런 쉐도우를 환영하지 않았다. 이런 일로 어꺠를 박살내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몇 분 동안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며 보냈다. 애석하지만, 승자는 쉐도우였다. 조커는 쉐도우에게 힘에서 완전히 밀렸으니까. 침대에 걸터앉은 조커의 어깨를 쉐도우가 주물렀다. 조커가 불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그래도 나름 힘 조절을 하긴 한 모양인지, 그렇게 아프지는 않았다. 아예 아프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지만. 괜찮아질 만하면 느껴지는 통증에 조커가 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무식하게 힘만 세긴! 일부러 그러는 거지! 좀 더 상냥하게 대해줘! 목까지 차오른 말을 꼭꼭 삼키면서.
“으으, 그보다 일어났으면 얼른 옷이나 갈아입어.”
“지도 잠옷인 주제에. 왜, 어디 나가게?”
“어제 거기 갈 거야.”
“박물관? 아니, 미술관이었던가?”
“아니, 수족관.”
“하?”
조커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어젯밤 들어갔던 수족관은 확실히 이상했다고. 쉐도우가 말했던 대로 안에 경비 한 명 없던 것이, 함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누가 벌인 짓이든, 확실히 경찰의 소행은 아니었다. 그곳은 조커가 예고장을 보낸 곳도 아니었던데다, 그들이라면 좀 더 소란스러웠을 것이다. 그들은 당당하게 눈앞에서 괴도와 진검승부를 하는 사람들이니까. 쉐도우는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어, 제정신인 상태가 아니었고. 조커가 일찍 도착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일단은 조직일 가능성에 제일 컸다. 그들에게 있어 쉐도우는 지우고 싶은 치부고, 배신자였으니까. 그 조직이 아니더라도, 썩 좋은 일은 아닐 것이라 확신했다. 조커는 만약을 대비해, 다시 한번 그곳을 제대로 봐둬야겠다고 말했다. 쉐도우 역시,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표현하는 건, 좀.”
“맞잖아? 옷 다 갈아입으면 갑판으로 나와. 나도 준비하고 갈 테니까.”
“알았다고, 하치는? 거실에 있나?”
“아니, 원래 하치랑 둘이서 가려고 했는데. 카레 가루가 떨어졌다고 하지 뭐야.”
“아, 카레?”
“응, 그래서 장 보러 보냈지. 솔직히 아침 카레를 내가 어떻게 포기하냐?”
“너답다고 할지…. 근데 하치가 여기 왔었어?”
“어, 나보고 바닥에서 둘이 뭐하냐고도 물어보더라.”
쉐도우가 고개를 숙이며 머리를 짚었다. 그래, 하치에게까지 추태를 들켰단 말이지. 쉐도우는 방을 나가는 조커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다시 생각해도 부끄러우니까, 오늘 카레는 당근이 가득 들어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편식하려고 발악하는 조커를 보고 있으면, 동질감이 느껴져서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건 너무 짓궂나. 얼굴의 열을 식히기 위해서 쉐도우는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하늘 위라서 그런가, 구름이 유독 눈에 띄었다. 오랜만에 비가 오려나. 얼른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몇 분 뒤, 조커와 쉐도우는 갑판에 모였다. 조커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인지, 블러디레인은 두 명이 써도 되냐는 질문을 했다. 쉐도우는 싫다고 대답했고, 조커는 되는구나! 라고 반응했다. 비가 오면 같이 쓰겠다는 선언이었다. 쉐도우가 무기를 겨누었고, 조커가 두 손을 올리며 치사하다고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너도 우산 챙기면 되잖아. 싫어, 귀찮아. 쉐도우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 같으면 챙이 넓은 모자 덕분에 비를 일차적으로 막을 수 있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관광객으로 변장해 잠입할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더 물어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쉐도우는 블러디레인을, 조커는 벌룬껌을 이용해 수족관의 뒤편으로 착지했다. 조커는 물건을 잃어버려서 찾고 있다며, 순진한 관광객을 연기했다. 경비원이 분실물 센터의 위치를 알려주겠다며 지도를 꺼내려는 찰나, 쉐도우가 무기를 발사했다. 우산에서 나오는 레이저는 평소엔 굉장한 위력을 자랑했지만, 약하게 조절하면 사람을 기절시키는 용도로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경비원이 가지고 있던 무전의 전원을 끈 뒤, 수족관으로 잠입했다. 어둡고 긴 복도를 지나서, 경비실, 직원 휴게실, 사무실 등, 여러 곳에 도청기를 설치한 조커가 됐다는 듯 엄지를 척 들었다.
“이제 됐어, 집에 가서 카레나 먹자.”
“잠깐, 조커…! 거기는 나가는 방향이 아니…!”
“지금쯤이면 경비원이 깨어나서 신고했을걸? 관광객인 척하고 나가는 편이 안전하다고?”
그러려고 옷을 입은 거기도 하고 말이지! 조커는 해맑게 웃으며 쉐도우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오늘은 소란을 피우러 온 게 아니잖아. 쉐도우는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는 직원 한 명 보이지 않았는데, 오늘은 꽤 많은 직원이 일하고 있었다. 덕분에 몰래 복도를 지나가는 데에만 삼십 분 넘게 쏟았다. 벽 뒤에 숨고, 화분 뒤에 숨고, 창고에 들어가서 숨고. 뭐, 마지막엔 결국 이미지껌을 이용해 직원인 척하고 탈출! 이라는 전개였지만 말이다. 어두웠던 복도는 앞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점점 밝아졌다. 그리고 수족관으로 향하는 커다란 문으로 이어져 있었다. 근처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조커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문의 너머에는 사람이 가득한 수족관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문에는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고 적혀있었는데. 그것이 일반 관람객 눈에 띌까, 둘은 서둘러 문을 닫고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조명이 거의 없어 어두운 실내. 그러나 어제처럼 쓸쓸해 보이지는 않는다. 이곳저곳에서 빛이 일렁이고, 그림자가 진다. 눈 앞에 펼쳐진 물은 깊고 아름다워, 그 푸른빛에는 어둠이 없었다. 온전하게 빛나는 하나의 별 같았다. 물고기가 자유롭게 하늘을 유랑하고, 사람들은 아래에서 감탄을 내뱉는다. 유리 속 풍경은 가을 하늘을 바라보는 것처럼 광활했고, 여름 하늘을 바라보는 것처럼 푸르렀다. 쉐도우는 위를 올려다보며 앞으로 나아갔다. 흰 물고기 수백 마리가 바닷속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은하수가 내려앉은 밤하늘 같았다. 손을 얹은 유리는 차가웠다. 그러나 어둠 속에 잠겨서 느낀 추위하고는 느낌이 달랐다. 불쾌하지 않은 차가움. 차갑기에 비로소 전해지는 아름다움이 이곳에 있었다. 쉐도우에게 있어 유리 속 세상은 언제나 지루한 것이었다. 끔찍할 정도로 말이다. 규칙적인 기계음과 무미건조한 사람들의 말소리. 투명하지만 빛을 잃어버린 물. 몸과 연결된 튜브는 몸을 가누지 못하게 만들었고, 커다란 호흡기는 고개도 제대로 돌릴 수 없게 했다. 물 너머로 보이는 것은 바래버린 회색빛의 벽. 태어나서 제일 처음 든 생각은 그거였다. 이거, 불편하네. 그러나 이곳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람들은 바닷속에 잠겨 환상에 젖었다. 이런 세상도 있구나. 이게 ‘밖’이구나. 바깥을 동경하는 동화 속 주인공의 심정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유치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그들은 이런 세상을 사랑했던 거구나. 어제 왔던 곳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활기가 이곳에 있었다. 나는 아직 멀었네. 쉐도우는 느리게 중얼거렸다. 어둡고 차가운 그곳이 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임무를 받으면서 전 세계를 돌아다녔지만 이처럼 마음을 울리는 곳은 없었다. 그리스에 있는 신전도, 커다란 왕국도, 높게 솟은 탑과 동상도. 사람들은 감탄을 냈지만, 자신은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저게 아름답다는 걸까? 굉장하다는 걸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곳엔 조직에서는 볼 수 없었던 세상이 있었다. 문득, 그것이 보고 싶어졌다. 지금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쉐도우의 발걸음이 서서히 느려졌다. 놀이동산을 처음 방문한 아이처럼, 연신 고개를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조커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여기 정말로….”
“와, 사람 많네. 참고로 괴도에겐, 사람을 숨기려면 인파로 들어가야 한다는 지론이 있지.”
“신기해. 물속인데, 다들 웃고 있어.”
“뭐, 관광지니까. 관광지가 그런 거잖아, 마냥 즐겁고 신기하고….”
“그럼 조커, 너도 그래?”
“밤하늘도 물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지.”
보기보다 감성적인 녀석이라니까. 조커가 덧붙였다. 쉐도우는 너도 그렇냐고 물었다. 너도 이곳이 즐겁냐가 아니라. 이에 조커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밤하늘도 물이라 부를 수 있다면. 쉐도우가 밤하늘과 물을 같은 선상에 놓고 보고 있다는 건, 조커도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것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물속에서 살았던 탓인지, 상상력이 그쪽으로 연결된 것 같았다. 지금도 그렇잖은가. 물속에서 웃을 수 있다니, 신기하다고. 그렇기에 알려주고 싶었다. 나도 그렇다고. 괴도는 밤하늘을 자유롭게 유랑한다. 이곳에서 살아가는 물고기들처럼. 그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마냥 어두워만 보이는 뒷세계에도 이런 사람들이 살고 있단 걸, 알려주고 싶었다. 도시의 야경은 아름답다. 그것은 밤하늘 아래에서만 아름다울 수 있다. 어둠은 외로운 것이 아니다. 수많은 빛이, 어둠에 의지한다. 쉐도우가 잠시 아무런 말이 없다가 이내 웃음을 지었다. 저렇게 밝게 웃는 건 처음 보네. 이번에는 조커의 말이 없어졌다. 그때, 쉐도우가 조커의 팔을 양손으로 붙잡으며 말했다. 저기도 가보자, 라고. 조커가 드물게 얼떨떨한 표정으로 지으며 끌려갔다. 정월의 보름을 닮은 황금색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제빛을 냈다. 그 황금빛에 옅게 비친 푸른색이 문득, 아름다웠다.
“저 물고기는 비늘이 절반 없어. 저 물고기는 크기가 너무 작고.”
“여긴 그런 물고기들만 모아 운영되는 곳이니까.”
“아, 안내 책자에서 본 것 같기도.”
“야생으로 나가면 죽을 것 같은 애들만 키운다는 게 대단하지?”
“응, 행복했으면 좋겠네. 저 아이들도.”
그날은 비가 내렸다. 우려스러울 만큼 많이 내린 것은 아니었지만, 땅에서 튄 물이 바지 밑단을 축축하게 만들 만큼은 내렸다. 아무것도 없는 물웅덩이의 색은 탁했다. 회색빛의 하늘을 머금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목의 웅덩이에는 빛이 있었다. 다양한 우산의 색을 머금고 있기 때문이었다. 찰박찰박, 사람들이 지나다닐 때마다 물소리가 들렸다. 평소라면 거슬렸을 그것이, 오늘은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졌다. 쉐도우는 수족관 입구에서 우산을 펼쳤다. 그러자 조커가 기다렸다는 듯이 쉐도우에게 팔짱을 끼었다. 쉐도우는 조커에게 떨어지라고 말했지만 밀어내거나 하진 않았다. 이건 씌워주겠다는 뜻이다. 조커가 핸드폰으로 근처 마트를 검색하며 말했다. 과자 좀 사서 돌아가자. 쉐도우가 대답했다. 곧 아침 먹을 거잖아, 안 돼. 그리고 우산을 쥔 손에 슬며시 힘을 주었다. 그에 조커가 입을 비죽 내밀었다.
“하치, 돌아왔으려나.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악덕 사장에게 걸려서 못 왔네.”
“그거 내 이야기냐?”
“너 말고, 지금 내 옆에 누가 있는데?”
“그러고 보니, 초반부를 못 봤었지. 밥 먹고 다시 보러 갈래? 다 같이.”
“…네가 최고라고, 내가 말 했던가?”
“우와, 태세 전환하는 속도 봐. 아주 장난 아니다?”
그렇게, 유난히 길었던 아침이 저물어갔다.
그리고 -
그로부터 한 달 뒤, 쉐도우의 도전장이 조커의 방으로 도착했다.
“분명 스승님이 너보고, 최소 3년 동안은 내 옆에 있으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그랬나? 근데 내가 그 양반 제자도 아닌데, 왜?”
“헤에, 뭐야. 상당히 뻔뻔해졌잖아? 이렇게 독립을 선언하는 녀석은, 네가 처음일 거야.”
“오~. 그거, 영광인가?”
애매했던 달이 가득 차오른 날. 조커는 옥상 난간 위에 서 있는 쉐도우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오늘은 달이 맑았다. 유달리 밝았다. 달을 등지고 선 쉐도우의 모습이 역광을 받아 검게 흐려졌다. 그러나 집어삼켜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별이 무수한 하늘. 흘러가는 구름. 그것이 아름답다고 느낀 건 언제부터였을까. 그림자가 뻗은 손이 달에 닿을 수 없다면, 달 역시 손을 뻗어도 그림자에 닿을 수 없다. 그 사실을 너는 알고 있을까. 나 역시 수천 번 네게 손을 뻗었다. 겨우 닿았다. 그리고 다시 멀어진다.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아쉽지 않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겠지. 두 사람의 망토가 기분 좋게 펄럭이고, 조커는 제 손에 들린 보물에 슬며시 힘을 주었다. 이것은 증거였다. 내가 네 우상이라는 증거. 쉐도우는 그것을 잠시 바라보다가 순순히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얼핏 본 건물 아래에서 경찰차의 네온이 보였다. 지금쯤이면 절반 올라왔으려나. 이런, 또 져버렸네. 아쉬움이 밀려왔으나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살면서 겪은 패배 중 가장 기분 좋은 것이었다.
“이제 어디로 갈 거야?”
“로즈를 찾으러.”
“네 가족?”
“맞아, 로즈는… 날 반기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무서워도 부딪혀보고 싶어졌어.”
“부럽네, 여러 의미로 말이야.”
“뭐?”
“농담, 농담.”
조커는 미소를 잃지 않고 말했다. 그동안 겪었던 쉐도우의 방황은 어쩌면, 그녀만 홀로 두고 조직을 빠져나왔다는 죄책감이 만들어낸 것은 아니었을까. 연보라색만 보면 정신없이 뒤를 쫓는 것도 그렇고, 과거에 관한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것도 그랬다. 혀끝이 쓰네. 네 시선은 언제나 먼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 속에 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란 적이 있다. 사실, 지금도 그렇다. 정말로 뒤를 쫓고 있던 건 우리 중 누구였을까? 하지만 늘 그렇듯, 욕심으로 널 붙잡아둘 생각은 없다. 괴도만큼 자유로운 존재가 또 있을까. 바람 같은 것이다. 찰나를 스쳐 지나가는, 그렇기에 더 소중한. 더 멀리 나아가는 너를 응원한다. 그러니…. 쉐도우가 난간에서 내려왔다. 망토가 움직임을 따라 크게 펄럭였다. 쉐도우가 다가왔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조커가 보물을 잡은 손을 뒤로 뺐다, 그러나 쉐도우가 잡은 것은 조커의 팔이 아니었다.
“농담 더럽게 재미없어. 다음에 만날 땐 더 재밌을 걸 준비해와.”
“잠, 깐!?”
조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설마, 이게 질투라는 건가? 질투라는 단어로는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러나 혼자 삽질하는 무척이나 터무니없어서, 너도 그랬을까. 방황하는 나를 보면서, 또 혼자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을까. 지금까지 그런 태도를 보여왔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내 고민의 절반은 너였다. 그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왠지 조금 더 과감해지고 싶은 기분이었다. 너는 내 빛인데, 구원인데. 혼자만의 짝사랑이라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아직 아무것도 끝난 게 없으니까. 그런데, 이런 기분이라니…. 이건 전부 네 탓인 걸로 하자. 쉐도우는 조커의 넥타이의 윗부분을 잡고 끌어당겼다. 조커의 상체가 앞으로 휘청였다. 서로의 모자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입과 입이 닿았다. 이에 조커의 다리가 뻣뻣하게 굳었다. 갈 곳을 잃은 손이 공중을 배회했다. 모든 것을 앞서서 준비하는 저 녀석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어가는 지금이 좋다.
“…쉐도우!?”
“너무 놀라는 거 아냐? 아, 혹시 처음이었어?”
“아니, 그….”
“조커. 난 이번 여름, 수영장보다는 바다가 좋아.”
“뭐, 좋아. 밤하늘이 아름다운 곳으로 가자.”
쉐도우가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많은 별이 일렁이고 있었다.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보면 항상 느꼈다. 나 같은 건 아무리 빛을 내고 닦아도 행복해질 수는 없다고. 물속에서는 온전한 행복을 찾을 수 없으니까. 빛에 이끌려 물속에서 뛰쳐나왔는데, 아직도 수면 깊은 곳에 갇혀있단 기분이 들었다. 이곳은 밝은데, 따뜻한데, 퀘퀘한 냄새도 나지 않는데. 올려다본 밤하늘이 일렁였다. 수면처럼 일렁였다. 밤은 물과 다를 바가 없는 걸까. 이대로 눈을 감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물속에서 환하게 웃던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한다. 내가 날 이끌어주면서 잡은 손의 온기 역시 기억한다. 열등감도 패배감도 전부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솔직해지자. 나는 너를 이기고 싶어. 너란 나란히 이 밤을 걷고 싶어. 라이벌이라고 불러줬으면 좋겠어. 어린애 취급은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난, 더 이상 보호받기만 하는 어린이가 아니니까. 나는 세상을 향해, 손을 뻗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그게….
“최고로 괴도답잖아, 안 그래?”
그림자인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니까. 세상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고. 보란 듯이 사는 것이 최고의 복수임을 알고 있다. 나도 너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 있을 것이다. 밤은 모두에게 열려 있으니까. 쉐도우는 조커와 이마를 맞대고 말했다. 조커가 마주보며 웃었다. 코발트 빛의 깊은 푸른색. 마치 수족관을 그대로 옮겨온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했다. 그 눈동자 속에 담긴 나를 보고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내 눈을 마주 보고 있는 너도, 나와 같기를. 요란스러운 사이렌 소리 사이로, 조커의 비행선이 건물의 위를 날아올랐다.
“순위 따위, 금방 따라잡아 줄게.”
“글쎄~. 신입에게 따라잡힐 만큼 어리숙하진 않은데, 어쩌나?”
만천의 달이 빛나고, 무수한 별이 빛나고. 세상을 덮은 어둠이 도시의 빛으로 일렁인다.
경찰들이 코앞까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옥상의 문이 열리기까지 앞으로 몇 분.
떨어진 모자를 주워 들고, 조커와 쉐도우는 서로에게 이별을 고했다.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면서, 밤하늘이 일렁이는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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