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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있는 곳에는 그림자 또한 존재하는 법.
두 사람 사이에 쌓여온 몇 년이라는 공백은, 정말 많은 것들을 남겼고 정말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그래서였을까, 그들은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기 전에 이것들을 전부 풀어내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새로운 집에 살기 전에, 이삿짐을 하나하나 정리하듯이. 그것은 새로운 미래에 대한 즐거움을 주면서도, 앞으로의 생활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두 사람이 원하는 행복에 도달하려면 이것들을 신중하게 풀어낼 필요가 있었고. 그것을 위해서는 너무 지나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진실한 '대화와 소통'이 필요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필사적으로 감추고 싶은 것도 있을 것이고, 트라우마로 남아 거부감을 느끼는 것들도 있을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쯤은 갖고 있는 아주 당연한 고민이었기에, 가끔은 숨기고 거부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으로 일생을 함께 살아가게 될 가족의 문제를, 더 이상 모르는척하며 덮어둘 필요는 없다. 혼자서 모든 것을 안고 가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두 사람을 비롯한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 용담의 꽃말 - 당신이 슬플때 나는 사랑한다 ]
'…으으, 큰일 났다. 정말 하나도 모르겠는걸.'
늦저녁, 방에서 펜을 이리저리 굴리던 로즈는 이내 책상 위에 쓰러지듯 엎어졌다. 이 정도는 이제 스스로 풀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이 설명할 때, 뭘 들은 거냐. 집중 안 하고 다른 생각하고 있던 건 아니냐. 벌써부터 귓가에 오빠의 잔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로즈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그것들을 쫓아내려 애를 썼다. 평소에는 참 착하고 다정한 오빠지만, 이렇게 보면 참 단호하다고 밖엔 설명할 길이 없었다. 로즈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더는 한계라며 쉬고 싶다 소리치는 머리를 아무리 굴려도 모르는 건 모르는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전부 포기하고 침대에 누워 잠이나 청하고 싶었지만, 잔소리와 더불어 숙제의 양이 배로 늘어날 것을 생각하면 편하게 잠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있잖아, 오빠."
"로즈?! 자, 잠깐만!"
똑똑 - 결국 방 밖으로 나와 쉐도우의 방문 앞에 서게 된 로즈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안에서 무언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봐서, 또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작업하는 모양이었다.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의 무거운 노크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그러자 평소의 쉐도우답지 않게 꽤나 놀란듯한 목소리가 복도로 돌아왔다. 우당탕탕 하고, 무언가 한바탕 넘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얼마 안 가 문이 열렸다. 쉐도우는 멋쩍게 웃으며 빠르게 밖으로 나와, 자신의 방문을 닫았다. 부끄럽기라도 한 걸까, 방금의 소동을 들키기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얼핏 본 방안은 어쩐지 처음 보는 천들로 잔뜩 어질러져 있었다. 옷이라도 고치고 있던 걸까? 하긴, 쉐도우의 활동복 팔 부분이 찢어져서 마친 수선을 고민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숨기는 이유는 아직 잘 모르겠다.
"오빠, 괜찮아? 방금 무슨 소리가…"
"어, 응! 별거 아니었어, 그보다 무슨 일이야?"
"사실, 이 문제 말이야. 잘 모르겠어."
"이건… 스스로 풀어보라고 했던 거잖아."
로즈는 공책을 펼쳐 태연하게 검지로 문제를 가리켰다. 쉐도우는 문제와 로즈를 번갈아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역시 예상한 대로였다. 쉐도우는 이런 면에서 꽤나 단호한 오빠인지라, 로즈의 부탁을 쉽게 들어줄 생각은 아마 없어 보였다. 로즈는 그런 쉐도우를 빤히 바라보며 한 번 더 설득했고, 쉐도우는 시선을 피한 채로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얼핏 보면 화난 건 아닐까 걱정할지도 모르겠다만, 이건 알겠다는 긍정의 의미라는 걸 로즈는 알고 있었다. 여동생을 이기는 오빠는 세상에 없는 법! 로즈는 속으로 환호를 불렀다.
그렇게 평소보다 지루한 시간이 흐르고, 밤 11시가 다 넘어가는 걸 확인한 쉐도우는 책상에 기대 반쯤 졸고 있던 로즈를 가볍게 흔들어깨웠다.
"이 부분은 다음에 다시 확인할 거야, 준비해둬."
"…으, 으응."
쉐도우의 청전벽력같은 말에, 비몽사몽 책상에 기대고 있던 로즈는 몸을 일으켜 방금 복습한 내용을 빠르게 되짚었다. 확인이라니, 혹시 시험 같은 걸 보겠다는 선언인가! 방금까지도 참을 수 없었던 졸음이 확 달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이게 과연 필요한 타이밍에 기억이 날까? 아니, 그렇게까지 완벽하게 이해한 건 아니었던지라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쉐도우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온 이상, 이미 주사위는 던져진 거나 다름없었기에. 로즈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쉐도우가 조심스럽게 방 문고리를 잡으며 물었다.
"로즈, 괜찮아? 혼자서 잘 수 있겠어?"
"물론이지!"
로즈에게 향하는 그 말이, 어딘가 살짝 떨리는 목소리였다고. 왜인지 그런 기분이 들었다. 혹시 아직도 자신이 걱정되는 것일까, 로즈는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바람처럼 안심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쉐도우는 별다른 말없이 로즈의 방에서 물러났다. 잘 자, 두 사람은 인사를 주고받았고, 이내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로즈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공부도 공부지만, 정말로 힘든 건 사실 따로 있었다. 쉐도우에게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날 이후, 혼자서 잠에 드는 건 조금 무서운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미 많은 고생을 한 쉐도우에게 더 많은 짐과 부담을 주기 싫어서, 쉐도우에게는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 찔렸다."
쉐도우는 방으로 돌아와서 엉망진창인 자신을 방을 보며 쓰게 웃었다. 아무래도 너무 급하게 나가려다 발에 천이 걸린 모양이었다. 덕분에 부끄러운 모습으로 넘어졌으니 말은 다 한 셈이다. 각지각색으로 널부러진 천은 다행히도 크게 주름지지는 않았다. 조직에서 살 때까지만 해도 방안에 물건이 너무 없어서 문제였는데, 이번에는 물건이 너무 많이 쌓여서 문제였다. 이것도 분명 좋은 일이라고, 거의 자신을 세뇌하듯이 되뇌였다. 흐트러진 천을 정리하면서도, 방 안에 넣을 공간을 만들기 위해 물건들을 이리저리 옮겨보면서도. 물론 그 과정에서 미처 치우지 않았던 바늘에 손을 찔린 건 덤이었다. 이런 덤은 필요 없는데!
"…하, 빨리 완성해야되는데."
쉐도우는 옆에 쌓인 천들을 보며 막막함을 느꼈다. 이 나이 먹고 간단한 바느질에도 재능이 없는 자신이 한심해졌다. 애초에 잘하는 것 하나 없는 인간이니, 이런 손재주라도 있는 게 다행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비관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단순히 사실을 말한 것일 뿐이니까. 큰 오해는 없기를 바라지만, 이래서는 속도가 너무 느렸다. 원하는 걸 만들기까지 몇 주는 걸릴 것이다. 쉐도우는 곰곰히 생각을 하던 중,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에 블러디레인을 챙겨 밖을 나섰다.
다음 날 아침, 조커는 느닷없는 차가운 공기에 눈을 떴다. 어제 창문을 열어놓고 잤던가. 사실 밤새 게임에 집중했던 탓에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날도 춥고, 시간도 이르고. 이대로 이불을 좀 더 뒤집어쓰고 잘까 싶었지만, 곧 아침 먹으라며 자신을 깨우러 올 귀여운 조수를 생각하며 꾸물꾸물 침대에서 기어나와 짙은 푸른색의 와이셔츠를 챙겨 입었다. 오늘은 일찍 일어났다며 의기양양해진 조커는, 이내 자신을 찾으러 오지 않는 조수에게 의문을 느꼈다. 오늘은 조금 늦는 거려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고 해도 발걸음은 어느새 거실로 향하고 있었다. 결국 제 발로 거실로 왔다며 투덜거리면서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갸웃거렸다.
"쉐도우?!"
"어, 너 의외로 일찍 일어나네?"
"우와, 오늘 무슨 일이세요, 조커님! 조커님이 아침에 다 일어나시고?"
"하? 둘 다 너무한 거 알아?"
"맞아, 밥은 식탁에 차려놨어요!"
"알았어, 근데 아침부터 둘이서 뭐해?"
"…별로, 네가 상관할 바 아니니까."
조커는 식탁에 앉으면서도 툴툴거리는 걸 잊지 않았다. 아침부터 둘이서만 신나게 떠들다니, 괘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퉁명스럽게 그들을 바라보던 조커는, 문득 쉐도우의 손가락이 꽤나 상처투성이임을 깨달았다. 옛날에 생긴 상처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단순한 훈련으로 인해 긁힌 상처라기보단, 날카로운 무언가에 수차례 찔린 느낌이었다. 그에 관하여 무언가 더 말하려고 했던 순간, 쉐도우는 9시가 다 넘어가는 시계를 보고 흠칫 놀라더니 주섬주섬 무언가를 들고일어났다. 여기까지 저 많은 짐을 다 들고 온 모양이었다. 이내 집에 가봐야겠다며 블러디레인을 챙겨, 망설임 없이 뛰어내리는 저 대담함은 언제 봐도 참 익숙하지 않았다. 쉐도우가 돌아간 뒤, 조커는 하치에게 물었다.
"그래서, 무슨 볼일이래?"
"아, 바느질을 배우고 싶다고 하셔서…"
"바느질?"
쉐도우가 집에 도착했을 무렵, 로즈는 혼자서 거실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어쩌다 가끔씩 찾아오는 혼자만의 시간은 어딘가 텅 빈 느낌이 들었다. 그런 느낌이 싫어서, 멍하니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보기 시작했고, 한 TV프로그램을 발견했다. 요란스러우면서도 어딘가 빠져들게 만드는 캐스터가, 주요 뉴스들을 빠르게 전달해주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뉴스에서 나오는 어려운 용어들, 옛날에는 이해가 잘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꽤나 잘 알아듣고 있었다. 공부의 성과라는 건 이런 걸 말하는 걸까? 오빠가 지금까지도 머무르고 있는 자신이 모르던 세계에 대해, 마치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다양한 것들을 알려준 이 채널을, 직접 챙겨보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야 쉐도우는 유년기 시절을 일은 입을 열어주지도 않으니까. 이것을 알려고 하는 건 상처를 들추는 행동이라는 생각에, 아직까지도 차마 입을 열지 못한 주제였다.
"오빠 왔어?"
"응, 뭐하고 있었어?"
"으응, 아무것도."
배고프지, 저녁 금방 차려줄게. 쉐도우는 능숙한 손길로 앞치마를 메고 부엌으로 향했다. 의기양양한 그 뒷모습이 어딘가 불안하게만 느껴졌다. 자신 있게 부엌으로 들어가 놓고선, 3분 후에 망연자실한 얼굴로 냉동식품을 전자레인지에 돌리는 모습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도 있구나 싶어서. 어쩔 때에는 저런 모습이,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오빠의 모습과 똑같아서 내심 반갑기도 했다. 뭐, 음식이 입에 들어가는 순간에는 변해도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로즈는 밝게 웃으며 도와주겠다고 앞치마를 둘러멨다. 처음에는 꽤나 잘하는 듯싶었지만, 더 크게 난장판 된 부엌을 치우는 시간이 그저 늘어나버린 건 둘만의 비밀이었다.
"있잖아, 로즈는 밤이 무섭진 않아?"
"오빠도 참~,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뭐가 무섭겠어?"
"그… 그건 그렇지."
저녁식사 도중, 쉐도우는 제 손을 몇 번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다른 곳으로 시선을 거두었다. 괜히 안 좋은 소리나 꺼내 긁어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이 로즈를 불안해하고 있다는 사실이 들킨다면, 착한 로즈는 자신을 신경 쓰느라 심적으로 고생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색한 침묵은 일상으로 화제를 돌리는 것으로 끝이 났다. 쉐도우는 무덤덤하게 설거지할 그릇들을 챙겨 주방으로 다시 들어가 버렸다. 무언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로즈가 알 턱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자세히 물어보는 것이 좋았을까,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등을 타고 흘렀다.
그날 밤이었다. 로즈는 여느 때처럼 혼자 잘 준비를 마쳤다. 이대로 잠들어서 일어나지 못하면 어떡하지. 깨어난 순간부터 줄곧 자신의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는 생각이었다. 아니면 자신은 잠깐 잠들었다 느꼈는데, 또 시간이 오래 흘러가버린다면. 무거운 손길로 베개를 정리하던 중, 낯선 꽃향기와 함께 처음 보는 판다 인형을 발견했다. 누덕누덕 상당히 엉성하게 꿰매어진 인형을, 누가 여기 갖다 놓은 것일까. 로즈는 익숙한 천 색깔에, 이 인형을 자신의 오빠가 만들었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퀄리티는 조금 미흡할지 몰라도, 소중한 가족이 하나하나 정성을 쏟아 만들었을 것을 생각하면, 가게에서 파는 인형들보다 더욱 애착이 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괜스레 피어오르는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로즈는 그날 인형을 품에 안은 채 잠들어버렸다.
"어디다가 뒀더라…"
"인형 찾아?"
"어… 뭐야, 언제 왔냐?!"
방에 두었던 인형이 사라진걸, 뒤늦게서야 눈치챈 쉐도우는 방안을 샅샅히 살펴보았다. 아니, 방 안을 뒤집어엎고 있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로즈는 괜찮은 것 같으니, 실패한 인형은 이만 버려버리자고. 자신만 괜히 미련을 가지고 있던 것 같아서 부끄러운 그 흑역사를 빨리 없애버리자고. 그렇게 결심한 순간, 인형을 종적을 감추었다. 어디서 나온 건지, 상큼하게 제 앞으로 튀어나온 조커를 보며 쉐도우는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꽤나 가벼운 목소리로 건넨 질문에 쉐도우는 그만 인상을 구겨버리고 말았다.
"네가 숨긴거냐?"
"아니, 로즈 방에 가져다뒀는데."
"…뭐, 그걸?"
"그래그래, 넌 항상 솔직하지 못한 게 문제니까. 어쩔 수 없었다고?"
조커는 능청스레 쉐도우의 침대에 걸터앉아 말을 이었다. 자신이 모를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라고. 정곡을 찔린 쉐도우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그저 불만스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자신이 잠에서 깨고 눈을 떴을 때, 다시 그 차가운 푸른빛의 천장이 보인다면 어떻게 할까. 꿈처럼 행복한 현실은 왜인지 받아드리기 힘들었고, 익숙하지도 않아서 괜히 더 불안감을 느꼈다. 그래서 로즈도 자신과 같을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도 로즈는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이었으니까. 전부 티가 나는 연기에 맞춰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걸 진심이라 믿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정말 쓸데없는 고민이라는 조커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복잡한 심정이 들었다.
"로즈의 잠이 무서운 쪽은, 역시 네 쪽이겠지?"
"…글쎄, 나는 당사자가 아니니까. 로즈가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는 몰라. 그래서 누가 더 무서워한다는 건 모르겠어."
"로즈는 꿈조차 꾸지 못했잖아. 그저 눈을 뜨니 시간이 흘러 있었을 뿐. 물론 그것도 충분히 비극적이지만, 그 몇 년을 눈을 뜬 채로 살아가던 넌 오죽하겠냐."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려. 수많은 기계장치들이, 그 연구시설이."
"로즈는 이제 꿈을 꿀 수 있으니까, 저런 악몽에 괴로워하지 않길 바라는 거지? 더 나아가 넌 로즈가 잠을 잔다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길 바라는 거고, 그렇지?"
"그래, 네 말 대로야."
"그것참, 눈물겨운 가족애네."
조커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상처를 제대로 치료하지 않은 두 사람이 모여서, 서로의 상처를 걱정해봤자 달라지는 건 전혀 없을 것이다. 변화를 위해서 필요한 건 계기, 조커는 그 무엇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쉐도우의 수상하고 미심쩍은 행동들을 살폈다. 그래서였을까. 정성스레 완성한 인형을 그냥 내팽개치고 돌아섰을 때, 조커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쩜, 과거랑 달라진 게 이렇게 없을 수가 있을까. 그건 아마 자신도 모르는 새에 큰 트라우마로 남았기 때문이었겠지.
"그래서 준비한 게, 저 인형이지?"
"무언가를 안고자면 안정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소리를 들어서."
"아하하, 그건 너에게 더 필요한 것 같은데?"
쉐도우를 가만히 바라보던 조커는 이내 미소 지었다. 쉐도우는 차마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안심과 안정이 필요한 쪽은 어쩌면 자신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커가 앉아있는 자신의 침대 아래에 웅크려 앉았다. 짙은 한숨이 담고 있는 것은 정말 많을 것이다. 그래도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즈가 그 인형을 아껴준다면, 자신도 조금은 불안감을 떨쳐낼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조커는 쉐도우의 방에 싱싱하게 피어있는 꽃을 보며 물었다.
"저 꽃은 시들지 않네."
"시들더라도 영원할거야."
내일은 로즈와 대화를 해보겠다고 결심했다. 인형은 어땠는지도 물어볼 겸사겸사, 조금은 솔직해지는 것도 필요한 일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다음날 아침, 해가 중천에 뜬 시간. 거실로 비척비척 걸어 나온 쉐도우는 놀라 움직임이 굳어버렸다. 자신이 만든 인형을 안고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맞이해주는 로즈의 모습에 괜시리 울컥한 기분이 들어서 새어 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고생한 모든 것을 보답받은 느낌이었다. 로즈는 그런 쉐도우를 차분하게 달래주며, 한 꽃다발을 내밀었다. 인형에 대한 보답으로 준비해봤단다. 쉐도우 역시 최대한 웃으면서 그 꽃을 받았다.
용담, 그 꽃말은 이제 다들 알 것이라 믿는다.
그 뒤로도 여러가지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동안 괜히 숨겨왔던 이야기나, 그동안 가지고 있던 불안감들 전부. 말을 꺼내면서 망설이기도 하고, 횡설수설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말에 경청했다. 그리고 서로가 원하는 이상을 담은 대답을 말해주었다. 두 사람은 몇 년이라는 공백을 대화로 채워나가고 있었다. 아직은 많이 부족하고 조율이 꽤 필요하겠지만, 두 사람이라면 잘 풀어나갈 문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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