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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조커 - 무화과 나무 아래에 핀 달맞이 꽃 하나

Z&E&W 2021. 10. 6. 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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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조커 메인&지옥남매(조합) 서브 + 퀸쉐도/스페아이

 

*자작 세계관 AU / 그에 따른 캐릭터 붕괴 주의

 

*죽음에 대한 묘사 주의

 

*미처 검수하지 못한 오타 주의

 

*보너스&외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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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과 편리함을 위한 인간의 소망은 발명이란 결과를  만들어냈고 끝내 이것들이 모여 인류를 성장 시켜왔다.  증기기관과 전구와 같은 것들이 그랬고,  전화기나 유리가 그랬고, TV나 청소기 같은 것들이 그랬고,  로봇과 인공지능 같은 것들이 그랬다.  지식과 발전에 대한 인간의 욕심은 끝도 없었고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냈던 것을 하나하나 새로운 것들로 밀어내기 시작하였다. 도장 대신 전자 사인이, 팩스 대신 이메일이, 집 전화기는 이제 옛날이 되었고 스마트폰이라 불리는 작은 기계들이 이젠 사진기의 영역까지 들락날락하며 넘보고 있었다. 인류의 발전은 그만큼 빠르게 이루어져서. 인류와 비교하자면 거의 영생과 가까운 아주 오랜 시간을 살 수 있었던 어느 마신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너무나 달라진 세상의 모습에 적응하지 못하고 어영부영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질 정도였다.

 

 

 

"인간들은 가만 보면 참 재미있단 말이지."

 

"..."

 

"자자, 처음부터 시작할게. 우리의 처음이자 최후의 게임을 - !"

 

 

 

아하하, 한 소년의 웃음소리가 밤하늘 공기에 녹아들었다. 눈 앞에 있는 상대의 눈빛은 고요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반짝거렸다. 처음 그와 눈이 마주쳤던 날,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던 가을의 낙엽처럼 죽어있던 눈동자가 떠올라 감회가 새로웠다. 그때는 그가 자신의 말에 답을 내리고 자신을 찾아올 거라고 감히 생각지도 못했었다. 지금 그의 눈동자는 푸른 빛을 여과 없이 발산하는 보석을 닮은 달, 달맞이꽃을 탄생화로 가지고 있는 자신에겐 더할 나위 없는 사랑이었다.

 

 

 

"그럼 여기서 문제, 인류는 왜 발전을 꿈꾸며 살아왔을까?"

 

 

 

첫째, 그냥 그러고 싶어서.

둘째, 지구에서 인류만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에 고취되어서.

셋째, 기왕 사는 거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어서.

 

 

대답을 하기 전, 우리는 마주 보며 웃어버렸다.

 

 

 

 

 

[ 츠바조커 - 무화과 나무 아래에 핀 달맞이 꽃 하나 ]

 

 

 

 

 

주화명(朱𤆄命) 6월 21일 1시 26분, 지구의 역대 최고 기온이  경신 되던 날.

 

잎마저 붉은 무화과 나무가 세상에 나타났다. 후진적인 인프라 탓인지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붉은 무화과 라니, 세상이 경악한 일임은 틀림없었다. 물론 무화과 나무의 열매의 속은 석류에도 지지 않을 정도의 붉은 빛이라는 점에는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덕분에 붉다는 것과 무화과 나무라는 단어가 생각보다 잘 어울리는 조합이라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지만, 일단 잎이 붉은 무화과 나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건 이 문제의 무과화 나무를 키워낸 장본인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처음 이 나무를 보았을 때 놀라지 않았다고 결코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나무가 다른 나무들과 달리 특별하기 때문이라고, 그는 그렇게 믿는 것처럼 보였다. 울적한 것인지 억울한 것인지 모를 목소리가 장 내에 울려 퍼졌다. 그림자가 수면에 돌을 던진 것처럼 울렁였고, 넘친 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운명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잔혹하고 잔인했다.

 

 

 

"...그래, 우리가 졌어. 이젠 네 마음대로 해."

 

"응, 너희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그럴 거야. 그러니까 너희들, 이젠 방해하지 마."

 

 

 

조커의 말은 잘 관리된 칼날보다도 날카로웠다.  어색한 침묵 속, 쉐도우는 조커를 매섭게 노려보다 고개를 떨구고는 이내 그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 버렸다. 감정을 삭이는 일은 언제나 어려웠다. 그런 쉐도우를 안절부절 바라보고 있던 로즈는 주춤거리다 급하게 그 뒤를 따라나섰다. 그들이 있던 곳은 어느 깊은 숲속 깊은 곳에 있는 동굴의 안. 그곳으로부터 숲의 출구까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달려 나간 쉐도우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마음만 같아서는 얼굴을 무릎에 파묻고 싶었지만, 자세를 고쳐 잡을 기력이 더는 남아있지 않았다. 하늘을 보며 묻고 싶었다. 자신이 바란 것이 이런 결과를 초래할 정도로 정말 큰 였는지. 자신의 오빠의 이름을 연신 부르며 달려온 로즈는 주저앉아버린 쉐도우를 보고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을 걸었다.

 

 

 

"시안 오빠, 괜찮아?"

 

"...뭐야. 결국 내가, 내가 나쁜 놈인 거잖아."

 

"시안 오빠."

 

"로즈, 나... 나, 나는 그저..."

 

"이만 집에 가자, 오빠."

 

 

 

너랑 계속 함께하고 싶어서, 네 곁을 떠나기 싫어서. 영원을 살아가는 네게 찰나가 되기 싫어서. 뜨거워진 눈시울에서 시작된 물방울은 뺨을 타고 흘렀다. 로즈와 함께 영원을 살아가면서 이런 감정은 진작에 메말랐다고 생각해왔는데, 어째서인지 멈출 수가 없었다. 자신의 마음도 몰라주는 조커가 원망스럽다기보다는, 이 모든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자신이 원망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로즈는 쉐도우의 손을 잡고 억지로라도 일으켰다. 쉐도우는 로즈를 자신의 품에 가두듯이 안고서는 흐느꼈다. 이런 감정을 느낀 것은 비단 쉐도우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의 그 누구도, 일이 이렇게 되리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것은 시장 바닥에서 굴러다니는 아주 작은 소문일 뿐이었고,  누군가가 먼저 겪은 아주 긴 여행일 뿐이었다.

 

 

 

-

 

 

 

"나, 여행 다녀오려고."

 

"여행?"

 

"저기 저 시장에서 사과 장사하던 아저씨가 그러는데, 동쪽 끝으로 가면  신선의 나라가 있대."

 

"신선? 너 설마 도라도 닦으려는 거야? 네 성격으로는 무리니까 포기해."

 

"뭐야, 그거 아니거든? 그곳은 옛날에 신이 처음으로 인간 세상에 발을 들인 곳이래."

 

"창조 신화에 나오는 그곳? 난 신이 날개를 잃고 추락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아무튼 그곳에서만 나는 신의 과일이 있는데, 그걸 통해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나 봐."

 

"말도 안 돼,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어?"

 

"나도 처음엔 안 믿었는데, 그 아저씨 친척이 거기 근처까지 가본 적이 있대. 길이 험하고 먹을 것도 부족해져서 그냥 돌아왔다고 하지만."

 

 

 

몇백 년 전이었던가, 다녀왔으면 해가 지기 전에 뒷산에 가서 나무나 좀 해오라고 잔소리를 하려던 퀸은 쉐도우의 뜬금없는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쉐도우는 시장에서 사 온 물건들을 정리하며 장황하게 말을 꺼냈다. 동쪽의 끝에 있는 붉은 신선의 나라, 그곳에서만 나는 신의 과일은 속살이 피처럼 붉으며 놀랍게도 꽃을 피우지 않는다고 한다. 꽃이 곧 열매라는 소문도 간간히 들렸다. 아무튼 그것을 먹으면 영생을 살 수 있는데, 신선들은 그것을 신이 내려주신 축복이라 부른다고 전해진다. 마녀, 주술사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이것은 영겁의 시간을 살아가고 신비한 힘을 쓰는 사람에게 붙여진 이름. 마녀의 고향이라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마을답게 신비한 힘을 타고난 로즈는 영생을 살며 마을을 수호하는 것이 관례이자 의례였다. 쉐도우는 그런 로즈 곁에서 계속 있고 싶어서, 사과 장수 아저씨에게 그 신선의 나라의 근처까지 도달했다 돌아온 친척을 제발 소개 좀 해 달라고 청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가보려고?"

 

"응, 너도 알잖아. 난 지금처럼 로즈랑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사는 게 꿈이야."

 

"그건 그렇지. 근데 그 아저씨는 왜 다른 과일은 안 팔고 사과만 팔고 있었대?"

 

"그거는 나야 모르지. 오늘 처음 보는 아저씨였는데."

 

"뭐어~? 너 그럼 처음 보는 아저씨한테 친척을 소개해 달라 한 거야?"

 

"아하하... 그게 그렇게 되나~? 아무튼! 일주일 뒤에, 출발하기로 했어."

 

"뭐, 좋아. 얼마나 걸릴 것 같은데?"

 

"글쎄, 그래도 몇 년은 걸리지 않을까. 그래서 말인데, 그동안 우리 로즈 좀 부탁한다고."

 

"새삼스럽게 부탁은 무슨, 우리가 같이 살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됐는데. 당연히 로즈는 우리가 챙겨줘야지."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해가 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어른들이랑 마을 근처 강에서 낚시하던 조커랑 하치가 돌아오고, 마을 아이들에게 이야기책을 읽어주던 스페이드랑 아이가 돌아오고, 촌장님 집에서 사람들과 마을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듣던 로즈가 돌아왔다. 다들 저마다 오늘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며 공동생활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렇게 오두막 바깥에 있는 화덕에 불을 지피고, 물을 끓이며, 저녁을 준비하는 시간까지도 여느 때와 같은 평화로움이 마치 태풍이 몰아치기 전의 고요함처럼 흘렀다. 저녁을 먹고 난 뒤에는 과일을 깎았고, 달이 하늘 높이 걸리자 오두막 속 아늑한 이불에 얼굴을 묻으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쉐도우는 다른 친우들에게도 자신의 여행 소식을 알렸다. 늘 마을 밖이 궁금하며 중얼거렸던 조커와 스페이드가 쉐도우의 이야기의 흥미를 느꼈다. 같이 가면 안 되느냐 옆에서 둘이서 사이좋게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쉐도우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허락을 해주었다. 그러나 흥미는 물감을 푼 물처럼 빠르게 전이되어 처음에는 마을 중앙에 있는 할아버지 댁에서 로즈랑 같이 지내도 되느냐고 물어봤던 퀸도, 이미 영생을 살기에 험난한 여정에 참여할 필요가 없던 로즈도 함께 가자고 말하며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결국은 쉐도우의 주변인 모두가 함께 동쪽으로 길을 나서게 되었다.

 

생각보다 험한 길은 아니었다. 모두가 무사히 소문의 장소에 도착했고, 그렇게 모두가 영생을 얻었다. 그렇게 행복하게 잘 살면 좋았을 것을,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너무 쉽게 영생을 얻은 것은 화근이었다. 신선의 경지에 오른 다른 사람들처럼 신이 내린 시련을 극복하고 깨달음을 얻어 그곳에 도달했으면 지금쯤 결과가 달라졌을까. 그날 신은 그들을 내려다보며 깔깔 웃고 있었을 것이 분명했을 것이라고, 훗날 쉐도우는 이를 갈며 말했다. 신이 내린 영생의 대가는 참혹했다. 로즈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만을 바랐던  쉐도우는 원하는 것을 이루어 로즈와 함께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만족감을 느꼈고, 그것은 할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는 것을 바란 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역사는 흘러가고 그만큼 많은 창작물이 세상으로 나오는 요즘, 하루에 새로 발간되는 책만 이제는 수백 권이었다. 안 그래도 서적에 관심이 많았던 스페이드는 그것을 전부 읽어보는 것을 목표로 삼으며 영생이란 것에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자신의 삶의 방향성을 정했지만. 여행에 가장 신이 나 있던 조커는 삶의 원동력인 호기심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세상의 모든 곳을 다녀보고,  알아보고 싶은 것은 전부 알아봤다. 하기 싫은 일에 대한 귀찮음과 거부감을 이겨내면서까지 채운 자기중심적인 지식욕은 채우면 채울수록 삶의 무료함을 불러일으켰다. 스페이드처럼 인생의 목표라도 있었으면 좋았을까. 매사에 성실하고 착실한, 소소한 곳에서의 행복을 놓치지 않는 그와 달리 애매한 자신은 분명 이조차도 질려버렸을 것이다. 상황이 그렇게 되니 조커에게 더 이상 남은 것이 없었다. 하루하루가 공허했고, 허무했다. 즐겨하던 게임은 지루해졌고, 반복되는 일상은 이제 신물이 났다. 빛을 잃어버린 텅 빈 세상에서 주변에 적당히 맞춰주면서 숨만 쉬는 것이 조커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치는 그런 조커를 걱정해 취미나 새로운 것들을 매번 권해왔지만, 안타깝게도 조커에게 크게 와닿지 않은 듯하였다. 새로운 것은 어느 순간 낡은 것이 되어갔다. 같은 음악을 이어가는 낡은 자동 인형처럼 삐걱거렸다. 그렇게 몇백 년이 흘렀을까, 조커는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생명은 유한하기에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조커는 죽음을 동경하게 되었다.

 

무너진 기초로는 훌륭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없다. 기본적인 결과조차 만들어 낼 수 없다. 잘 맞춰서 돌아가던 톱니바퀴 중의 하나가 고장이 난다면, 그 기계장치는 제대로 돌아갈 수 없다. 그것은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였다. 부품을 갈아 치우면 되는 기계장치와 달리, 인간관계는 한 번 문제가 생기면 되돌리기가 어렵기에 더욱 큰 문제를 불러올 때가 많았다. 죽음을 바라는 조커의 행동은 작은 균열을 만들어내, 서서히 주변을 일그러뜨렸다.  그들은 죽음과 가장 멀어진 사람들이었기에, 소중한 친우가 죽음을 바란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려야 했다. 조커가 만약 정말로 죽는 것에 성공한다면 조커는 이제 자신들에게 한순간의 찰나가 되는 것일까. 그것을 막고자 모두가 조커에게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쉐도우는 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주변에서 많은 걱정을 샀다. 조커가 그렇게 된 것이 본인의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라 방법이 다소 과하더라도 아무도 그를 말리지는 못했다. 그렇게 잘 굴러가던 톱니바퀴는 조금씩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오랫동안 조율을 받지 못한 피아노처럼,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모래 위의 박물관처럼.

 

 

 

"...쉐도우, 퀸? 너희 지금 뭐 하는 거야?"

 

"그건 우리가 묻고 싶은 말이야."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너희 지금 제정신이야?!"

 

"그건 너지,  제정신 아닌 건 우리가 아니라 너잖아."

 

" 뭔 헛소리야. 방금 너희가 뭘 한 건지 알기나 해?!"

 

"야, 이제 작작 좀 하자! 제발 우리 이제 작작 하자고!!"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쉐도우는 답답한 마음에 못 이겨 머리를 헝크러뜨렸고, 퀸은 한숨을 내쉬며 제 검을 만지작거렸다. 본래 열정과 집중력이 남들보다 뛰어났던 조커였기에 몇십 년이 걸린 끝내 찾아내고 말았던 것이다. 스페이드가 먼저 구해서 잘 숨겨두었던 영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방법이 엮인 책을. 조커를 죽음이란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뜨림으로써 마침내 이 대립을 종결시킬 기회를 얻었다는 친구들의 기대와는 달리, 드디어 이 지루한 삶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는 것에 첫 여행을 떠났던 그때처럼 희열을 느낀 조커는 책의 존재를 눈치채는 순간 빠르게 행동에 들어갔다. 퀸이 앞장서서 그를 찾아내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퀸은 조커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가 준비해 놓은 도구들을 산산조각을 내버렸다. 그의 죽음에 대한 열망에 이제 신물이 나는 건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근처에서 망을 보던 쉐도우를 빠르게 내치고 집으로 돌아온 조커는 부서진 희망에 고개를 저었다. 애석하게도 비난의 화살은 서로를 향했다.

 

 

 

"너 지쳤다는 거 알아, 안다고."

 

"네가 그만 끝내고 싶어하는 것도 알아, 삶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

 

"그렇지만 그것이 우리가 네 죽음을 방관하는 이유가 될 순 없어."

 

 

 

방금 잔인한 녀석들이라고 생각했지? 멍하니 집안을 둘러보던 조커를 향해 퀸과 쉐도우는 허탈한 감정을 실어 물었다. 쉐도우의 손끝이 무겁게 떨려왔다. 생명이 유한하기에 가치가 있다면 유한하지 않은 생명을 가진 우리는 가치가 없다는 것인가. 죽음이 아닌 삶에서 가치를 찾아줄 수는 없을까.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퀸은 문제의 그 책을 쉐도우에게 건넸다. 쉐도우는 그것을 태워버리려고 했으나, 조커가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리가 없었다. 어쩌면 예전부터 예견되어왔을지도 모를 몸싸움이 일어났고 조커는 책의 마지막 장을 가지고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가시가 정돈되지 않은 나무 바닥에 엎어진 쉐도우가 급히 그를 향해 무기를 겨누었을 때, 오두막에는 이미 아무도 없어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나중에 돌아온 퀸이 조커를 놓쳤다며 표정을 구기는 것으로 이번 대립은 흐지부지 끝이 났다.

 

 

 

"뭐야, 다들 옷차림이 평소랑 다른데...?"

 

 

 

스페이드가 조커의 위치를 알아낸 것은 21일이 되기 5일 전의 일이었다. 그로 인해 오랜만에 조커의 주변인들이 전부 모였으나, 이미 끊임없는 갈등이 모두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처음에는 지루함에서 오는 심경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충족시키면 문제없다고 믿었기에 많은 것을 그에게 안겨주었다. 그랬더니 다음엔? 삶의 목표를 두고 방황하는 것처럼 보여서 다양한 것을 이것저것 권유했다. 그가 처음 보는 새로운 것을 두고 눈빛을 반짝였을 때, 이젠 점점 괜찮아질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몇백 년간 이어진 큰 착각이었다. 서로가 끝없이 예민해져 갔고, 이젠 대화로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옛날 소년 만화처럼 너 죽고 나 죽자고 무기를 서로 겨누며 울분을 토하고 서로 엉켜버린 생각들을 풀어보기엔, 지금은 그저 싸움만 남을 것 같아서 참았다.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하기엔 너무 소중한 사람이었고, 반드시 후회가 찾아올 것만 같았다. 파국으로 가고 있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이 지금의 이들을 만들어냈다.

 

 

 

"그러게, 쉐도우. 네 활동복은 수백 년 전부터 보라색 아니었나?"

 

"하? 어둠의 그림자가 검은색인 건 당연한 거 아냐? 되려 너희는! 안 입던 검은 두루마기나 입고 말이야. 컨셉 겹치니까 바꿔줄래?"

 

"가끔은 이런 기분 전환도 나쁘지 않잖아."

 

"그래, 이런 건 다 같이 입어야 의미가 있기도 하고."

 

"의미는 무슨! 너희가 그런 색 입으면, 그렇게 말하면, 불길하기만 하거든? 거듭 말하지만 난 그런 의미가 아니니까!"

 

 

 

검정, 그 색이 가진 의미를 쉐도우는 손사래를 쳐가면서 부정했다. 평소처럼 말을 주고받는 와중에도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평소보다 분위기가 과잉되어있다는 느낌도 받았다. 그가 염원대로 여기서 죽거나, 살더라도 지금의 관계가 파탄 나거나. 검정색 옷은 그런 앞날에 보내는 기도이자, 추모였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다고 말하는 쉐도우의 옷도 결국의 검정색인 것처럼, 그들은 정해진 앞날을 보며 걷는 건실했던 신도처럼 깊은 숲속으로 발을 들였다. 그런 와중에 떠오르는 건, 언제였을지도 모를 기억. 새로 발매된 게임의 엔딩을 보고야 말겠다며 며칠을 집 안에 틀어박힌 조커를 햇빛 아래로 끌어내겠다며, 그때에도 모두가 삼삼오오 모여 조커네 집에 쳐들어갔던 적이 있었다. 마지막엔 하치의 잔소리를 피한다고 퀸 뒤에서 귀를 막고 있던 조커의 모습을 보는 것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다 같이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자며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았던 그 날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이런 소소한 행복이 이어지기를 바란 것이 정말 그릇된 것이었을지. 그 날 모두는 하늘을 보면 원망을 삼켰다.

 

 

 

"...하하, 그런 의미 아니라고 부인하더니 가장 먼저 가버리는 게 어디 있어."

 

 

 

생과 사는 신이 관장하는 영역, 그렇기에 영생을 하는 모든 것은 신께 죽음을 허락받아야 안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것을 알게 된 조커는 고해성사하러 온 신자처럼 신의 산물이라는 열매를 숲속 어딘가에 심어두고 모든 것을 걸고 길러냈다. 친구들의 눈을 피하려고 얼마나 고생했던가. 지금 자신을 구원해줄 결과물이 눈앞에 있었다. 어쩌다가 잎이 붉은빛을 띄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지금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 자신은 끝내 성공한 것이다. 그것을 본 쉐도우가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어딘가로 뛰어 가버렸지만, 그것도 지금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 건 남은 두 사람을 어떻게 하느냐는 것. 조커는 고양된 긴장감을 느끼며 카드를 꺼내 들었다.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부스럭거리는 작은 소리였다.

 

 

 

"흐아암... 어라, 너희는 누구야?"

 

 

 

하얗고 긴 손가락이 입가를 스쳤다. 흰 천 사이에 숨어있는 팔을 감싸는 붉은 천이 아름다웠다. 붉은 마신은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먼 하늘의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마신은 그런 위압감과 어울리지 않는 생각에 빠져있었다. 아직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인가. 졸음으로 비몽사몽 하는 몸을 달래며 겨우 눈을 뜨니 상황이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큰 목소리로 언성이 오가다가 급기야 무기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렸기에, 도저히 다시 잠들 수 없는 환경이었다. 갈등을 소년 만화 식으로 끝내려는 건가. 그런 것 치고는 분위기가 험악해 보여서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렇다고 완전히 대립하는 적이라고 하기에는 서로가 너무 애절하달까 절절하달까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 마신의 이름을 달고 지내면서 인간들의 치정 싸움은 종종 봐왔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이 정도였나 의문이 들어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꾸물꾸물 몸을 조금씩 움직이고 있자 은발의 소년이 눈을 반짝이며 말을 걸어왔다.

 

 

 

"있지, 나를 죽여줘."

 

 

 

그것은 이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 단번에 이해가 되는 한 마디였다.

 

 

 

"좋아, 네 소원을 들어주지."

 

 

 

신의 과일이랬나, 그것은 자신의 탄생 목이었다. 뭐, 마신도 신이라면 신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 그렇기에 인간들은 그것에 굉장한 전설이나 의미를 부여했다고 알고는 있었지만, 그 영문 모를 소문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것은 언제나 자신이었다. 죽음을 바라는 마녀를 도와주는 것은 가능했으나, 안타깝게도 섭리를 거스른 인간을 도와주는 법을 자신은 알지 못했다. 애초에 마녀는 생명을 관장하는 태초의 신이 그렇게 태어나게 했기에 외롭다고 토로하고 억울해하더라도 조금은 이해가 갔는데, 섭리를 거스른 인간은 본인 스스로 그 길은 선택한 것이 아닌가. 원하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으면 될 일이다. 인제 와서 후회한다며 매달리는 인간은 질색이었다. 그렇게 마신은 고민에 빠졌다. 정석대로 거절하는 것이 옳았지만, 인간은 이해하기 어려운 생물이라서 문제였다. 단번에 거절했다가 되려 자신에게 험한 말을 내뱉는 경우도 허다했다. 귀찮은 뒷말을 만들지 않으려면 신중해야 했다.

 

 

 

"대신 조건이 있어."

 

"뭐든지 할 수 있어!"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인류는 왜 발전을 꿈꾸며 살아왔을까?"

 

 

 

첫째, 그냥 그러고 싶어서.

둘째, 지구에서 인류만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에 고취되어서.

셋째, 기왕 사는 거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어서.

 

 

 

"정확하게 대답할 수 있다면 네 소원을 들어줄게."

 

"잠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시간? 글쎄, 유예 기간이라도 달라는 거야?"

 

 

 

조커는 말문이 막혔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문제에 당황한 것도 있지만, 정답을 숟가락으로 퍼서 떠 먹여주는 느낌이라 불안해진 것이다. 자신은 이리도 심각한데, 천하가 태평하게 하품이나 하는 상대를 보자 짜증이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문제를 너무 대충 내는 것은 아닌가.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말을 질려버릴 만큼 들어온, 아주 중요한 시험의 문제지를 받은 학생처럼. 이 문제의 어딘가에 저 신의 함정이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결론을 내리자 내놓을 정답이 없어졌다. 차라리 계산과 관련된 문제라든가, 우주와 만물에 관련된 철학적인 의견을 물어봤으면 편했을까. 조커는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3번."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직접 겪어보기라도 했어?"

 

"그렇게 나올 줄 알았어. 미안하지만, 경험 같은 건 해본 적 없는데."

 

"좋아, 그럼 무리야."

 

"웃기지 마, 네 선택지 중에서 가장 정론이었잖아?"

 

"네가 말하는 허울뿐인 그 정론은 이론으로서는 정답이겠지만, 네 인생을 바꾸는 정답이 될 수 없거든."

 

"야, 야! 그러지 말고! 널 내가 어떻게 깨웠는데!"

 

"내가 램프 속에 있던 녀석도 아니고 불러냈다는 이유로 착취 당하는 건 사양이거든~?"

 

 

 

정확한 답을 알아 와, 네 인생을 바꿀만한 가치를 정답으로 주장해. 그럼 들어줄게, 네가 선택한 답이 거짓된 것이라도. 마신은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자신은 인간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이렇게 여지를 남겨두고 저 멀리 도망가버린다면 이 인간은 그 남아버린 가능성을 붙잡는다고 발악하느라 더 이상 자신과 엮이지 않을 것이다. 이미 수많은 인간의 전적을 봐왔기에 쉽게 확실할 수 있었다. 그것으로 상황은 종결되었다고 매듭짓고, 마신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면서 산소가 부족한 머리에 공기를 주입했다. 조커는 억울하다는 듯이 퀸과 스페이드를 바라보았다. 너희도 지금 저 마신의 행패를 보았다면 뭐라도 한마디 해 달라는 표정이었으나, 퀸과 스페이드는 시선을 피했다. 그도 그럴 게 그들이 조커를 도와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들은 마신이 조커를 죽일 마음이 없다면 오히려 대환영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폐인의 길을 살지도 모를 친구를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두 사람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우리, 이제 그만 아무것도 모르고 엉엉 울고 있을  쉐도우나 찾으러 갈까?"

 

"그래, 마신도 깨어났겠다. 더 이상 방해하지 말라고 하는데, 이제 우리가 뭘 어쩌겠어?"

 

"야, 그러지 말고! 이 방법도 실패하면 난... 나는..."

 

 

 

저 간절함으로 보건대, 무슨 방법을 내놓든 조커는 철석같이 믿을 것만 같았다. 해결책을 주는 척하고 다른 길로 인도한다면 어떨까? 제대로 된 사리 분별과 판단이 되지 않는 지금의 조커라면 분명 눈치를 채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에 가까운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화를 내더라도 네가 물어보지 않지 않느냐며 어물쩍 넘어가면 괜찮을, 적당한 계획을 준비하려면 시간이 조금 걸린다. 스페이드는 실풋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검은색 망토를 마신에게 둘러주었다. 그 시간은 이 마신이 벌어다 줄 것이다. 눈을 깜박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마신을 뒤로하고, 지금 걱정할 것은 불완전 요소에 모든 것을 의존한 계획의 성공 여부였다.

 

 

 

"제대로 된 답만 알아내면 되는 거네?"

 

"음, 그렇지...?"

 

"그럼 직접 발전된 세상을 경험하면 되는 거 아닐까?"

 

"그거 좋네! 마신이 약속을 어기고 도망치면 안 되니까, 조커랑 같이 다니면 되겠다!"

 

 

 

눈치 빠른 퀸이 손뼉을 치며 추임새를 넣었다.  방금까지 제 계획을 방해하려고 한 두 사람이었던 만큼 의심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조커도 나쁘지 않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는 눈치였다. 그렇게 할 말을 잃어버린 마신의 의사는 아무도 존중하지 않은 채로, 두 사람만의 여행이 계획되었다. 이것저것 말해주길래 같이 따라올 줄 알았는데, 퀸과 스페이드가 어디론가 급히 떠나는 모습을 보며 조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적당한 타이밍에 마신을 언제든지 따로 빼낼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이 모를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페이드가 처음 제안했을 때 얼추 느낀 것이었지만, 이 여행에는 저들이 원하는 것이 있다. 뜻대로 어울려주지는 않을 것이라 다짐하며 조커는 얼마 없는 짐을 챙기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이름이 뭐야? 너라고 부를 수는 없으니까."

 

"인간의 이름 같은 건 없어. 네가 지어줘."

 

"...그럼 아카이 츠바사로."

 

"응? 내 날개는 붉은색이 아닌데...?"

 

"됐어, 오늘부터 붉은색인 거야. 붉은 잎에서 태어난 주제에."

 

 

 

조커는 잎이 무성하게 자란 무화과 나무를 바라보았다. 친구들의 눈을 피해 몇 년 동안 소중하게 기르면서 많이 봐왔지만, 잎이 붉은색이라 그런지 단풍 같다는 느낌은 여전히 지울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저 단풍잎 같은 나뭇잎보다 붉은 피를 토해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는데, 지금은 그 어느 순간보다 허탈하고 허망했다. 그런데도 자잘하지만 선명하게 눈앞에 보이는 저 희망을 차마 놓아버릴 수가 없어서, 그토록 지겨워했던 속세로 돌아가게 된 자신이 우스워졌다. 차라리 여기서 마신을 데리고 시위라도 해볼까. 그런 실없는 생각을 대변하듯 살랑살랑 옅은 바람에 잎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런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진다.

 

 

 

"퀸에게 받은 지도를 보면 현재 이 세상에 있는 왕국은 3개야."

 

"많이 줄었네? 내가 저번에 깼을 때는 8개는 있었던 것 같았는데."

 

"내 기억에도 5개는 있었던 것 같은데, 그새 멸망한 건지 없네,"

 

"그래서? 세 왕국을 전부 돌아보게?"

 

"당연하지! 네가 경험이 부족하다고 빠져나갈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렇게 신중할 필요는 없는데... 뭐, 어울려줄게."

 

 

 

-

 

 

 

"...그래서 그 녀석은 어땠어. 결국 죽어버렸냐?"

 

"스페이드가 막아줬지. 뭐, 아직은 임시방편이지만."

 

"그러냐, 잘됐네."

 

"반응이 너무 무미건조해진 거 아니야? 그새 감정이 메마른 거야? 약간 붉어진 네 눈가처럼..."

 

"아니거든!"

 

 

 

한적한 마을 근처에 있는 숲속의 화원. 미로를 거치면 나오는 작은 쉼터에서 쉐도우는 한 손으로 턱을 괴며 생각했다. 생각할수록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여행 좀 보낸다고 사람이 바뀔 일이었으면 처음에 진작 바뀌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지루하다는 그 녀석이 활기찬 관광지를 보며 지겹다는 표정을 짓는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보였다. 음료를 하나 시켜서 근방을 돌아다닌 것 말고는 하지도 않겠지. 이제 할 일은 이 여행 중간에 조커의 식어버린 감정을 되살릴만한 일이 아주 우연찮게 일어나는 걸 바라는 수밖에 없는데, 그게 확률적으로 가능한 일일까? 퀸과 스페이드는 우리가 그 사건을 뒤에서 몰래 만들어주면 된다고 계획을 세우는 모양이지만, 조커가 계획대로 움직여준 적은 놀랍게도 단 한 번도 없었다. 결국은 운의 문제라며 쉐도우는 고개를 저었다.

 

 

 

"있지, 퀸은 뭘 준비했어?"

 

"그게 아직 고민 중이야. 어린아이 작전은 어때? 그토록 사랑하는 제자를 떠올려보라는 의미에서."

 

"좋다~ 우리 중에서 조커를 가장 기다리는 건 하치잖아. 분명 조커도 반응해줄 거야."

 

"맞아, 천하의 조커도 그 사실이 몸소 와닿으면 차마 두고 볼 수만은 없겠지."

 

"어때, 오빠? 오빠는 생각해봤어?"

 

"글쎄, 어렵네."

 

"응응, 그렇네! 오빠도 굳이 말하면 조커처럼 여행이 필요한 타입이니까?"

 

"...뭐, 뭐? 잠깐, 저기 로즈~?"

 

 

 

세상에 불만이 많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감정을 좋은 방향으로 자극하는 건 역시 어려운 일이다. 그런 방법이 있다면 그것이 필요한 것은 바로 그런 자신이 아닐까. 쉐도우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로즈가 자신을 바라보며 키득키득 웃어 보이는 것에 별다른 반박을 하지 못하였다. 여기서 제대로 된 아이디어를 꺼내지 못하면 자신은 단순한 원인 제공자로 남을 뿐인 걸까. 조커가 언젠가 삶을 선택할 날이 왔을 때, 그 속에 자신은 여전히 이들과 함께 있을 수 있을까? 만약 조커를 구하지 못하면 자신은 주변인들에게 원망을 듣게 될까.  쉐도우는 퀸을 바라보았다. 햇빛을 닮은 금발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이 금발에 원망받는다면 처음으로 자신의 선택을 조금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로즈가 자신을 연신 부르고 있었다. 잠시 졸기라도 했던 걸까, 쉐도우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급히 대답을 꺼냈다. 멍한 자신을 로즈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달래주었다. 꿈에서 깨지 못한 몽롱한 기분은 여전했지만, 그만큼 여전히 자신에게 있어 세상은 로즈였다. 그러고 보니 소중한 사람을 떠올리게 만들어 준다고 했던가. 그 녀석 반응은 확실하게 볼 수 있겠네, 라며 쉐도우는 내심 속으로 퀸을 응원했다. 가까운 곳에서 머리카락을 흔드는 바람이 오늘따라 아주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있지, 오빠."

 

"응?"

 

"이런 건 어떨까?"

 

 

 

-

 

 

 

첫 번째로 도착한 왕국은 하늘을 닮은 바다의 시원함과 흰색의 상쾌함이 드러나는 항구 도시였다. 바다 냄새가 물씬 풍겨오는 이곳은 계단식으로 지어져 있는 흰 벽과 푸른 지붕의 건물이 인상적이었다. 햇볕이 적당히 뜨겁게 내리쬐는 이곳은 해산물뿐만이 아니라 신선한 과일이나 우유와 같은 유제품, 그리고 밀이 자주 생산되는 곳으로 유명한 지역이기도 하였다. 바다가 아닌 육지가 가까운 지역에서는 올리브도 자란다고 하는데, 덕분에 예로부터 풍족한 생활이 가능한 곳이라고 한다. 원예농업도, 가내 수공업도 아주 훌륭한 곳이라 예로부터 상인들도 이곳을 자주 방문했었다고 한다. 신의 성지라고 불리는 곳이기도 하였으니 성지순례를 위한 수행자들이 길게 이곳에 머물면서 관광업도 활성화되었다. 부자들은 이곳에 별장을 몇 채나 사놓는다고 하던데, 전부 이유가 있는 일이었다. 이런 시각적으로도 청각적으로도 평화로운 기분이 드는 곳은 자연스럽게 관광지가 되는 법이다. 계속되는 사람들의 시선에 두 사람은 사람들 사이에 어색함 없이 녹아들 수 있는 옷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는 중이다.

 

 

 

"이거 어때?"

 

"저기... 혹시 패션 센스가 없다는 말, 자주 듣지 않아?"

 

"엑, 이거 별로야?"

 

 

 

츠바사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 하였다. 그런 츠바사도 특이하게 생긴 후드에 눈을 반짝였으니, 제3자의 눈으로 본다면 동병상련 같지만 말이다. 둘은 옷 한 벌로도 꽤 많은 웃음을 지었다. 그러다가도 금세 지루해진 것인지, 크게 기지개를 한 번 쭉 편 조커가 츠바사의 손목을 잡고 바다 쪽으로 이끌었다. 잠시 한눈을 팔았지만, 그렇다고 이곳에 온 목적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사람을 보려고 이곳까지 왔으니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지금은 한낮이니, 이런 곳이라면 바다에 사람들이 제일 바글바글할 것이다. 가서 몇 시간을 멍을 때리든 바다에 발이라도 담그든 뭐라도 해야만 했다. 바다 냄새가 짙어지자 츠바사가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기 시작했다. 이상함을 눈치챈 조커가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도망가지 못하게 막음으로써 일단은 일단락되었다.

 

 

 

"그래서, 물에 오래 노출되면 죽는다고?"

 

"응, 그래서 물이 많은 곳은 별로 안 좋아해."

 

"그래도 좋겠다. 부럽네, 탈출구가 있는 건 좋은 거잖아."

 

"글쎄, 전혀 아닌데. 그래, 넌 죽음이 탈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응? 그거야 물론..."

 

"으윽... 뭐야, 이거 완전 달아..."

 

"야, 잠깐! 하품쟁이! 그거 내가 시킨 거거든?!"

 

 

 

결국 두 사람은 한적한 카페의 외부 테라스에서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것으로 했다. 사람이 많았지만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이, 마치 무음의 흑백이었던 옛날의 영화를 보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이야기가 오가던 와중, 이 지역의 명물이라 직원이 강력히 추천했던 청포도 에이드는 그렇게 조금 줄어들었다. 가만히 있다가 의도치 않게 주문한 음식의 첫입을 빼앗긴 조커가 그 조금도 아깝다는 듯, 한 손으로 에이드를 높게 들어 올리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때 햇빛이 츠바사의 눈앞에서 강하게 아른거렸다. 햇빛을 받은 에이드의 옅은 연두색이 유리잔 너머로 보이는 아쿠아마린 빛의 바다 색깔이랑 섞여 맑은 에메랄드빛을 내고 있었다. 위로부터 시작되는 노란색 그라데이션이 남풍을 타고 날아가는 수선화의 꽃잎처럼 아름다웠고, 아래로부터 시작되는 진한 연두빛의 그라데이션이 페리도트처럼 아름다웠다. 얼음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작게 울릴 때마다, 탄산이 바다속의 물거품처럼 유리잔 속을 떠다녔다. 인간들 사이에서 스쿠버 다이빙이 인기 있는 이유가 아주 잠시나마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그 바다를 품고 있는 저 푸른 빛의 눈동자였다. 츠바사는 에이드의 탄산처럼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물을 가까이하면 안 되는 몸이어도, 이렇게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바다에는 거부감이 그렇게 많이는 들지 않았다. 아니, 되려 아름답다고 느껴버렸다. 저런 바다라면 머리카락 끝까지 잠기더라도 아프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아하하, 그렇게 아까우면 나중에 내가 하나 사줄게."

 

"됐어, 어디 도망이나 가지마."

 

"그건 알겠다니까~, 하여간 인간들은 남의 말은 곧잘 믿어주는 법이 없어."

 

"너라면 널 믿겠냐, 이 하품쟁이가."

 

 

 

두 사람은 카페를 나와 옆 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계단식 건물의 특성상 골목길이 꽤 많았지만, 전부 많은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이라 그런지 골목길 특유의 위험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되려 일정한 거리마다 적혀있는 신에 대한 교리가 이 마을의 평화를 드러내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신앙이 제일 먼저 전파된 곳은 바로 이 마을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전부 신의 수호 아래에서 지내고 있는 걸까. 그래서 저렇게 웃을 수 있는 것일까. 그런 마을 사람들의 활기찬 웃음은 신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도 긴장이 풀리게 할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물론 두 사람의 실력이라면 그 어떤 위험한 상황도 문제가 없겠지만 말이다. 그들이 머무른 카페 안쪽에서 스페이드랑 아이가 사이좋게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은 두 사람이 이 왕국을 벗어날 때까지는 비밀이었다.

 

 

 

"카페에서 들었는데, 여기가 현지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장소래."

 

"저번에 봤을 때랑 변한 건 거의 없는 것 같은데... 아, 페인트칠 새로 했나 보네."

 

"조커, 너는 신을 믿어?"

 

"응, 내가 지금 여기 있는 건 전부 그 신이라는 녀석 때문이니까."

 

"대답이 재미없네, 그게 다야?"

 

 

 

마을의 서쪽, 바다만큼이나 맑고 투명한 유리가 형형색색으로 빛이 났다. 유리잔 너머로 봤던 탄산의 바다만큼이나 아름다웠다. 츠바사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곳에 발을 들였다. 이미 잘 알고 있는 곳이라는 듯 조커를 먼저 앞질러 가며 유리에 새겨진 형상에 대해서 말을 해주었다. 여기에 새겨진 사람은 누구고, 저기에 새겨진 사람은 누구인지. 이곳에 옛날에 무슨 일이 있었고, 그 사람이 이곳에서 신자로 모셔지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이곳이 왜 신을 모시는 지역이 되었는지. 매번 같은 말을 반복하며 박물관에 전시물들을 소개해주는 큐레이터처럼, 이런 곳을 소개해주는 사람은 항상 비슷한 이야기를 꺼내었다. 두루뭉술하고 추상적인, 눈으로는 잘 와닿지 않은 이야기들 뿐. 그런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의 비슷한 반응이 늘 지겨웠다. 신앙심에 눈물을 흘리거나, 이야기는 안중에도 없다는 표정으로 그저 아름다운 광경에 홀려 있거나. 그런 모든 것이 예상대로 떨어지는, 피곤하고 지루하기만 한 여행에는 이제 신물이 났다. 그렇기에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에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스페이드가 이래서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한 걸까?  츠바사가 보여주는 따라잡을 수 없는 과거의 지식, 과연 그는 마신이라 불린 존재였다.

 

 

 

"웃기단 말이지, 저 녀석 나랑 만났을 적에는 울보였거든. 지금은 성인 군자라니."

 

"친했어?"

 

"친구였어."

 

 

 

남들보다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고, 걸음이 점점 늦어지던 둘은 결국 해가 다 저물어 갈 때쯤이 다 되어서 그곳에서 나올 수 있었다. 금방이라도 환한 빛을 낼 것만 같이 느리게 깜박이는 등불을 따라 두 사람은 골목길을 내려왔다.  끝이 붉은빛을 띄는  보라색으로 물들어가는 바다는 한적해서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몇 명 보이는 것이 다였다. 다들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이나 숙소를 찾았고, 현지인들은 저녁과 밤에 있을 장사를 위해 마을의 불을 밝히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조커가 앞장서서 츠바사를 이끌었다. 숙소로 가는 길에 만난 아이들이 손을 흔들었다. 옛날과는 정말 많이 달라진 풍경에 저도 모르게 입에 미소를 걸었다. 이 정도로 발전된 곳을 자신의 옛친구들이 본다면 분명 기쁨의 눈물을 흘릴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 한 구석이 적적해졌다.

 

 

 

"숙소 네가 잡은 거야?"

 

"아니, 스페이드 녀석이 잡아줬어. 나 속세랑 너무 떨어져 살아서, 그동안 모아뒀던 돈이 어디에 있는지 잊어버렸거든."

 

"그럼 내일부터는 그거 찾으러 가보는 건? 보물찾기 게임처럼!"

 

"글쎄, 알고 있을 것 같은 사람이 따로 있어서 괜찮아. 스페이드한테는 그 사람에게 받아 가라 하지 뭐."

 

"그런 중요한 것까지 알고 있고, 그 사람은 네게 소중한 사람인 거지?"

 

"...그렇네, 소중한 사람이야."

 

 

 

숙소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기 전까지, TV는 예전에 어디서 본 것 같은 프로그램을 비추었다. 오히려 예전에 방영했던 프로그램이 더 재미있었던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무리 재미있다고 소문난 프로그램이라도 금세 지루해져 버렸다. 샤워를 마치고 거실로 나왔을 때, 츠바사가 TV 근처를 기웃기웃하다 아래 서랍에서 찾아 게임을 꺼냈다. 눈을 반짝이며 그것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이 어린이날 부모님께 갖고 싶었던 것을 선물 받은 어린아이 같았다. 마신이라도 게임을 TV와 연결하는 법은 모르는 건지 그것을 들고 강아지처럼 TV 근처를 맴도는 그가 제법 우스웠다. 귀여워 보인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몇 만 년은 족히 살았을 마신은 어째서, 모든 것에 흥미롭다는 눈을 하고 있는 걸까. 그는 이 삶이 지루하지도 않은 걸까. 자신이라면 지루해서 죽어버렸을 것이다.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말을 삼키며 조커는 그것을 TV와 연결해주었다. 컨트롤러의 사용법을 알려주고 게임의 공략법을 알려주는 사이, 달은 하늘 위로 떠 올랐다. 오랜만에 피곤함을 느끼는 몸은 이불이 선사하는 푹신함에 금방 녹아내렸다.

 

보름달이 되기에는 애매한 달을 보며 작은 아이는 입을 열었다.

지금은 애매하기 그지없는 저 달이 끝까지 차오르면 어떻게 되냐고.

옆에서 신이 말했다.

예로부터 사람들 사이에서는 달이 차오르면 기운다는 말이 있지만,

자신은 그날이 어둡기만 한 밤이 가장 밝아지는 날이라 생각한다고.

 

 

 

"..."

 

"아무리 한적한 시간대라고 해도, 그런 차림이면 금방 눈에 띄고 말거야."

 

"...그렇네. 그건 네 말이 맞아."

 

 

 

바다가 연보랏빛을 띄는 새벽, 고개를 숙인 제비꽃이 노래하는 파도의 소리와 함께 모래사장에는 작은 발자국이 찍혔다. 추위에 얼어붙을 듯한 폐를 직접적으로 움직이기 위해 열린 입 틈으로 간간이 나오는 새햐얀 연기는 공기랑 뒤섞여 사라졌다. 기온이 차가우면 눈과 같은 색을 가질 수 있는 걸까. 그렇다기엔 시려오는 손끝은 봉숭아를 손톱에 물을 들인 것처럼 변해갔다. 곧이어 새벽녘의 별을 닮은 장신구가 갓 피어난 동백꽃을 닮은 천과 함께 바람에 맞추어 춤을 췄다. 이상했다. 겨울도 아닌 계절의 새벽이 이렇게 추울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이상했다. 움직이는 붉은 천이 이정표로 보였던 건지, 아니면 춤을 추는 동방의 붉은 무희의 망토 자락으로 보였던 건지. 순간 저 멀리서 세이렌의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세이렌은 뱃사공을 홀려 잡아먹는다고 했던가, 그 전설대로 지금 당장이라도 발목을 파도에 적시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나는 죽지 않으니까 괜찮잖아. 이 기시감을 언제까지 품고 살아갈 거야? 텅 빈 뮤지엄 홀에 머리를 부여잡은 끊임없이 누군가가 되뇌었다. 그럼에도 그 노랫소리를 따라갈 수 없었던 이유는, 내 가벼운 선택으로도 쉽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네가 내 곁에 있기 때문에.

 

 

 

"물은 질색이라 하지 않았어?"

 

"네가 도망가지 말라며."

 

"그렇네, 그것도 네가 옳아."

 

 

 

맞는다는 것과 옳다는 것에 차이점은 무엇일까. 결국 이도 저도 하지 못한 채, 발걸음을 돌렸다. 태양 빛이 건물의 흰 벽을 노란빛으로 물들이는 것을 지켜보면서 조커와 츠바사는 숙소가 있는 골목길로 들어섰다.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바람과 함께 새벽을 알리는 낮은 종소리였다. 하루를 일찍 준비하는 현지인들이 집의 커튼을 여는 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왔다. 평화로운 아침을 상징하는 새의 지저귐은 아쉽지만 들리지 않았다.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 있기에 언제 어디서든 그 위엄을 올려다볼 수 있는, 영원불멸의 신의 상징이 있는 곳을 무심코 바라보던 츠바사는 앞서가는 상대에게 넌지시 물었다.

 

 

 

"있지, 그거 알아?"

 

"뭔데?"

 

"인간을 돌보는 것에 관련된 신들은 하나같이 인간을 너무 사랑해서, 그 인간이 극복할 수 있는 시련만 준대."

 

"뭐야, 웃기지도 말라 그래. 사랑하는데 시련을 왜 줘?"

 

"...우와, 살벌하네. 듣는 마신님 상처 입는다?"

 

"마신은 신하고 달라?"

 

"으음, 글쎄... 신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을 뺀 존재를 마신이라 부르는 느낌?"

 

 

 

그날,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렇게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조커랑 츠바사는 많은 곳을 가기 위해 부지런하게 발을 움직였다. 축제가 열리는 거리에서 팔찌로 받았고, 가족 여행을 온 사람들의 사진도 찍어주었다. 전망대에서 수평선을 바라보았고, 마을 중앙 광장에서 울리는 거리 음악사의 공연을 구경해보기도 하였다. 여기 음식 전체적으로 밋밋하거나 달아서,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츠바사의 입맛에 맞추느라 무언가를 많이 먹어본 기억은 없지만 말이다. 바다 근처에는 그림자도 드리우지 않았지만, 바다라면 예전에 질릴 만큼 봐뒀기에 그것도 괜찮았다. 현지인들이 웃으며 말을 걸 때마다 자연스러워 보이려고 지은 웃음 때문에 얼굴의 근육이 아파졌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 끝에 죽음이 있다면, 이것이 인생의 마지막 여행이라고 생각한다면, 지금 여기서 갑자기 전쟁이 발발해 저 바다가 붉게 변한다고 하더라도 웃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그제 무심코 떠올려버린 소중한 사람이 지금 제 발목을 붙잡았다. 진짜로 여기서 만족해도 되는 걸까.

 

 

 

"그래도 바다는 갈 줄 알았는데, 여긴 거기가 제일 명소잖아."

 

"아직은 초반이니까, 너무 서두르지 말자."

 

"초반에 확!하고 승기를 잡아야지! 저대로 내버려둬도 괜찮아?"

 

"괜찮아, 초반에는 밑작업만 제대로 잘해주면 되니까."

 

 

 

차를 내주는 아이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며 퀸이 말했다. 조커의 일정을 지켜보는 것, 숙소는 우리가 알아서 잘 잡아주겠다며 길길이 우겼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덕분에 오직 결과만을 기다리며 노심초사하는 일은 사라졌지만, 과정을 지켜보는 일도 상당히 가슴이 떨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차하면 과정에 개입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주기를 바라며 바람을 잡아주는 것뿐이다. 그것이 강압적이면 되려 큰 반발심을 불러오리라는 것은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이 여행에 끝에는 무엇이 남아있을까.

 

 

 

-

 

 

많은 시간은 보내고 도착한 곳은 1년 내내 햇빛이 무더운 왕국의 수도였다. 과일과 물이 귀한 만큼 온갖 자원으로 넘치는 곳이다. 보석이나 석유와 같은 것들 말이다. 저번 왕국은 기후를 이용한 농축산업과 낙농업, 항구 도시를 이용해 해상업을 발전시켜왔다면, 이곳은 금속품을 이용한 상업과 향신료와 자원을 이용한 무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나갔다. 부드러운 천이나 귀금속 같은 것들이 이 왕국에서 파생되었다는 이야기가 많다.  또한 오랜 기간 음식을 보관하기 위해 향신료가 발달해왔으며, 덕분에 향이나 맛이 강한 음식으로 유명한 곳이다. 처음에는 음식이 귀해서 다양한 향신료 개발에 많은 재정을 쏟은 나라이지만, 이제는 이런 독특한 맛을 좋아해 많은 돈을 쓰려고 오는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서 향신료 개발에 재정을 투입한다고 한다.

 

 

 

"으... 여기 음식은 매워서 좋다!"

 

"그럼그럼! 역시 카레는 매워야 제 맛이라니까!"

 

 

 

입에서 금방이라도 불이 나올 것만 같이 화끈거렸다. 이 절절하게 매운 자극이 뇌의 신경을 자극하는 느낌이 들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짜릿함에 조커는 매워도 입에 물을 대지 않았다. 종종 이렇게 먹는 것을 통해 행복을 찾는 사람이 있다.  힘들 때 카페를 찾아 시원한 음료를 한 잔 마시거나, 비가 오는 날에 전을 부치며 자연의 운치를 느껴보거나. 생일날 케이크를 사서 돌아가기도 하고, 친구들과 맛집을 돌아다니며 우정을 다지는 사람들도 있다. 음식에 얽힌 추억은 수만 가지가 있고, 그 추억을 꺼내는 법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츠바사는 조커의 부지런하게 움직이던 손이 점점 느려지는 것 같다고 느껴졌다. 조커는 카레로 누군가를 떠올린 걸까? 그렇다면 이것도 조커의 주변에서 계획한 일의 일부인 걸까? 츠바사는 그릇을 비우고 슬쩍 자리를 이탈했다. 벽돌로 지어진 집은 진흙이 주재료였던 것 같다.  그런 집들의 뒷골목에서 츠바사는 낯익은 얼굴을 만났다.

 

 

 

"그러니까, 저번에 까만 조커 옆에 있던..."

 

"맞아, 난 로즈라고 해. 대화는 나눠본 적 없지?"

 

"응, 있잖아. 여기가 네가 관할하는 구역이야?"

 

"관할...? 앗, 너 퀸을 만나러 온 거구나? 퀸이라면 이미 가버렸는데 어쩌지...?"

 

 

 

로즈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츠바사를 맞이했다. 몸짓이 살짝 과장된 느낌이 강해서 그런가, 츠바사는 자신의 앞에서 활짝 웃어 보이는 저 상대가 우연을 가장해 자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였을까, 둘은 처음 대화를 나누는 사이임에도 어색함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로즈는 눈을 빛내며 전설 속의 마신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냈고, 츠바사는 그들의 의중과 관련된 여러 질문을 던졌다. 대답해주기 곤란한 문제가 화제로 나오거나, 대화가 너무 무거운 방향으로 흘러갈 것 같으면, 로즈는 아무도 물어보지 않은 사소한 이야기를 꺼내며 주변을 환기하곤 했다. 예를 들면 이곳은 자외선이 세서 피부가 곧잘 따가워지니까 오빠가 빌려줬다는 보라색 우산에 관련된 이야기 같은 것 말이다. 마치 "이 부분은 말해줄 수 없어!" , "미안, 비밀이야!"라고 돌려 말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츠바사는 궁금한 문제라도 두 번은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러던 와중 로즈가 슬며시 걸음을 옮기며 어딘가로 향하자 츠바사도 로즈를 따라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그날 까만 조커는 왜 도망친 거야?"

 

"우리 오빠는 의외로 마음이 여려서, 무서워하는 것이 많거든."

 

"...생긴 건 나라도 멸망시켜봤을 것 같던데."

 

"가끔 상황을 회피하고 싶은지 도망쳐버리기도 해."

 

"이상하네, 인간은 결국 죽잖아. 받아드릴 수 없다는 걸까? 미련이라는 불완전한 감정 때문에?"

 

"처음 느껴보는 미지의 감정 때문에, 라고 정정할게."

 

"...아, 너희는 신의 축복을 받았다고 그랬었지? 스스로 말이야."

 

"그렇네, 그렇기에 너에게 이런 말은 역시 웃긴가? 우리는 스스로 속세를 떠났으니까."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까르르 웃으면서 할 수 있는 인간은 드물 것이다. 그 드문 인간이 자신의 눈앞에 있지만 말이다. 눈앞의 상대는 자신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고개를 연신 끄덕인다거나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상한 방향으로 튀는 추임새가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다. 눈앞에 서있는 인간은 청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조커와 또래인 만큼 오랜 기간 인생을 살아왔을 것이 분명한데, 순간 인간이 아닌 존재처럼 느껴졌다. 로즈는 자신이 인간이라고 확신하며 대답을 줬지만, 미심쩍은 기분이 석양에 저물어가는 그림자처럼 늘어졌다. 눈앞의 상대는 상상력이나 창의력이 뛰어나 활발하고 주변의 말을 곧잘 믿는 어린아이 특유의 밝은 면모와 경험의 부족으로 인한 단순한 사고가 불러오는 어린아이 특유의 잔인함을 품에 꼭 안고서, 세상에 아직 아무것도 없던 시절 세상에 홀로 놓여 신의 시험을 받는 태고 시절의 인간 같았다. 그래, 신이 가장 사랑했던 인간 말이다.

 

 

 

"그래도 조커는 원래 엄청나게 반짝거리는 사람이거든. 나는 네가 그 친구를 곁에서 지켜봐 주었으면 좋겠어."

 

"확실히. 다른 인간들에 비하면 흥미롭긴 했어. 그렇다고 그것이 그가 특별하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속는 셈 치고 기대를 걸어도 좋아, 곧 특별해질 거거든."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네가 나에게 그렇게 말해주고 있으니까."

 

 

 

츠바사가 영문 모를 로즈의 말에 그것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려고 한 찰나, 과일 가게의 주인이 목청 크게 오늘따라 사과가 싸다며 손님들을 모으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앞서서 걸어가던 로즈는 츠바사를 향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싱긋 웃는 얼굴과 몸 선을 따라 부드럽게 움직이는 분홍빛 머리카락이 좋은 의미로 현실과의 이질감을 만들어냈다. 이건 눈앞의 상대가 속세에서 벗어난 인간이기에 그렇게 느껴지는 걸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있는 걸까. 그럼 나중에 보자, 인간을 사랑하지 못한 신님. 츠바사가 다시 한번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로즈는 인사를 건네고는 분홍빛의 잔상을 남기며 사라졌다. 그때 확신한 것이 하나 있다. 자신의 앞에서 때로는 어린아이처럼 웃고, 때로는 속세를 통달한 신처럼 말하던 저 인간은 인간이 아니었다는 것. 그 잔상은 얼마 안 가 아지랑이처럼 흩어져 버렸지만, 왜인지 자신에게 시장 안으로 들어가라고 등을 떠미는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츠바사는 마녀의 속삭임에 홀려 시장의 안쪽으로 들어섰다.

 

 

 

"형! 진짜 진짜 고마워요!"

 

"고맙긴, 얼른 집으로 돌아가라."

 

"네! ...아, 밤에 불꽃놀이 하거든요! 그거 엄청 예쁘니까 형도 꼭 봐주세요!"

 

 

 

한편 돌아오지 않는 츠바사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녀 보고 있던 조커는 안절부절못하는 어린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평소라면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입에서는 무슨 일이 있냐는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어린아이는 심부름 값을 잃어버렸다며 고개를 숙였다. 사정까지 다 들었으면서 차마 어린이를 혼자 두고 갈 수 없었던 조커는, 익숙한 손길로 아이에게 목마를 태워주며 시장을 거닐었다. 그렇게 둘은 운 좋게 파란 천으로 된 지갑을 주었다는 사람과 마주쳤고, 아이는 무사히 심부름을 마칠 수 있었다. 지갑을 주웠다는 사람은 사막의 모래보다 곱고 아름다운 금발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모자를 깊게 눌러 쓰고 있어서 얼굴을 확인하지는 못하였다. 두 손 가득 짐을 들었음에도 자신에게 끝까지 손을 흔들어주던 아이의 모습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 나갔다. 아이에게 손을 느릿하게 흔들어주던 조커는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조커, 여기서 뭐해?"

 

"...아니, 아무것도."

 

 

 

이곳은 전에 있던 곳보다 해가 금방 떨어졌다. 태양 빛에 금빛으로 반짝이던 모래는 등불을 받아 은은하게 빛이 났다. 마을과 조금 떨어진 달빛이 비치는 곳에는 은빛 모래가 밤바다처럼 펼쳐졌다. 여느 때처럼 숙소에서 멍하니 TV를 보고 있자, 츠바사가 보드게임을 들고 왔다. 처음 숙소에 들어왔을 때는 분명 없었던 것 같았는데, 이래저래 신기한 일이었다. 마치 게임을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좋을 만큼 츠바사의 게임에 대한 열정을 대단했다. 이번에는 숙소 주인아저씨에게서 게임을 얻어왔다고 말하는 츠바사에 의해 조커는 마지못해 보드를 펼쳤다. 역시 자신이 봤던 대로, 이 숙소에 있던 것은 아니었다. 게임의 규칙을 전부 알고 있는 조커가 츠바사에게 3연승을 막 따냈을 무렵, 순간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가 폭발하는 소리. 그래, 그 아이가 말해준 불꽃놀이였다. 조커는 그 아이의 말이 생각나기라도 한 건지, 숙소의 테라스로 나와 불꽃이 터지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여기 불꽃놀이가 정말 예쁘다고 자신만만했지만, 자신은 불꽃놀이 축제만 수백 년 봐왔다. 그것은 하늘을 수놓고 있는 저 불꽃들이 어떤 원소의 화학반응으로 이루어지는지 전부 외워버릴 정도로 많이 봐왔다는 의미다. 역시 새롭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쩐지 오늘은 마음이 싱숭생숭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퀸 녀석, 오늘 돈 좀 깨졌겠네."

 

"어라, 그런 거야?"

 

"여기저기 사람 매수해두고, 불꽃놀이까지 준비했잖아."

 

"그래서?"

 

 

 

그대로 방으로 돌아가려는 조커를 츠바사가 불러세웠다. 츠바사는 모르는 눈치였지만, 이 마신에게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자신보다 오래 산 존재에 대한 위압감일까, 신의 앞에 서 있으니 진실을 고해야 한다는 강박감의 문제일까. 어느 쪽이든 좋은 핑계가 아니냐고 자조 섞인 웃음을 지으며, 조커는 입을 열었다.  처음 무감각을 느꼈을 때, 혼란함을 겪었을 때, 주변인들이 너무 소중해서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은 눈치 빠른 그들에게 통하지 않았고, 계속되는 주변의 걱정과 관심이 점점 부담스러워졌다. 처음에는 자신도 고칠 수 있다 믿었다. 주변에서 이끌어주는 대로 하면 자신도 그 주변에 녹아들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러자 자신이 문제라는 생각까지 들어, 자신만의 선을 만들어 그들과 자신을 분리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선을 그으면 그을수록 외로워져서, 나아가 그 외로움에 익숙해져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졌다. 하지만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 이상으로 주변에 걱정을 끼치면 숨 쉬는 것조차 불편해질 것 같았다. 그렇지만 주변인들은 그조차도 눈치채고 다가와 주었다. 그렇기에 죽음을 갈망했다. 그러면 이 모든 일이 끝날 것만 같았다. 그런 그 마음이 이 마신을 만나게 해주었다. 무엇이든 일단 들어는 줄 것 같은 작은 신. 어쩌면 자신은 이 순간을 바라고 있던 건 아니었을까. 불꽃 소리가 모든 것을 감추어 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실 잘 모르겠어, 나란 녀석에게 이렇게까지 모두가 나서야 할 가치가 있는지."

 

"가치는 주관적인 말이지만, 일단 난 있다고 봐."

 

"응? 왜 그렇게 확신하는데?"

 

"오늘 시장에서 처음 만난 사람한테 들었어."

 

"푸핫, 뭐야 그게."

 

"진짜야, 너랑 만나기 전까지 같이 다녔어. 한순간에 사라져버렸지만."

 

"네네, 거짓말도 그럴듯하게 쳐야지. 하품쟁이답게 또 어디서 졸았겠지, 뭐."

 

"아니거든, 제대로 깨어있었거든?"

 

"그래그래, 들어가서 잠이나 자자."

 

 

 

조커는 손을 휙휙 저으며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그때 츠바사가 조커의 손을 잡았다. 남들보다 훨씬 가느다란 손가락은 마치 얇은 얼음판을 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러워졌다. 물론 그만큼 차가웠기도 해서, 불꽃의 마신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차가운 것에도 약한 츠바사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구겨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 손을 놓을 생각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들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상대를 응시했다. 어쩐지 후련해 보이는 얼굴이 세상을 통달하는 신처럼 보였다. 무거운 주제의 이야기였음이 분명했을 텐데,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겠다는 저 얼굴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스쳤다. 왜일까, 갑자기 가슴이 미칠 듯이 뛰었다. 숨이 가빠지고 눈물이 앞을 가렸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신은 자신의 분신인 인간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주며 자신의 눈에 닿는 곳에 두었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인간이 자신이 있는 곳까지 올라오길 바랐다. 그러나 신에 가까워진 인간은 어느 순간 무감각해져 가는 자신의 감정을 버티지 못하고 불행 속에 잠겨서 죽음을 동경했다. 인간을 너무나도 사랑했던 신은 인간에게 삶과 죽음에 대한 선택권을 주었다. 그랬더니 모든 인간이 죽음을 선택했다. 신의 사랑이 인간을 죽였다. 신의 욕심이 인간을 죽였다. 신은 인간을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더 이상 인간을 사랑하지 않았다. 신은 인간을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인간을 잊어버렸다. 인간은 신의 전부였기에, 인간을 잊기를 선택한 신은 기억을 잃고 땅으로 추락했다.

 

 

 

"뭐야, 왜... 왜 우는 건데, 너..."

 

"조커, 너는 신을 믿어?"

 

"믿어, 신이 있으니까 우리가 영생을 살게 된 거잖아."

 

"하하, 그랬지. 그랬어, 여전히 넌... 신을 싫어하는구나."

 

 

 

무덤덤한 표정에 마신의 의지는 사라져갔다. 차라리 일전에 만난 로즈라는 인간처럼 네가 장난스러운 어린아이의 가면이라도 써주기를 바랐다. 당장이라도 불꽃을 보며 저길 봐보라고 소리쳐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아무렇지 않은 척, 빛을 남기고 사라지는 불꽃처럼 이 감정을 숨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네가, 너희가 바라는 죽음은 그토록 간절한가. 너희를 그토록 사랑한 신을 등지면서까지? 역시 인간은 사랑할 수 없다고, 사랑하면 안 된다고. 그럼에도 마신은 잡았던 손을 놓지 못했다. 아니, 놓고 싶지 않았다. 이 손을 놓으면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조커는 자신의 손을 붙잡고 고개를 숙인 마신에게서 친구들을 보았다. 제발 살아만 있어 주면 안 되겠냐 빌었던 친구들을 등진 건 자신이었다. 그 누구보다 소중한 친구들이라고 말했으면서, 자신이 그 친구들의 손을 뿌리쳤다. 감정이 죽었지, 양심이 죽은 것은 아니다. 여기저기 찔려서 너덜너덜해진 양심에 물었다. 자신처럼 완전한 달이 되기 애매한 채로 하늘에 떠 있는 반달에 물었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면 좋으냐고.

 

불완전한 마음도, 대답도, 신께 고하면 용서받을 수 있을까.

 

 

 

"그래도 마신은 좋아해, 친구로서."

 

"네가 왜 울었는지 거기까진 난 잘 모르지만, 그렇다고 물어보지는 않을 거야."

 

"세상에는 알아야 될 지식과, 그렇지 않은 지식이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거든."

 

"그 대신 너, 나랑 친구 안 할래?"

 

 

 

아아, 사막의 밤은 춥다고 누가 그랬더라.

언제나 외롭게 하늘로 떠올랐을 달도 오늘은 불꽃과 함께 기에 외롭지 않아 보였다.

달을 닮은 너에겐 불꽃 그 자체를 상징하는 내가 있었다.

불꽃 그 자체를 상징하는 나에겐 달을 닮은 네가 있었다.

 

 

 

"...응, 할래, 그 친구라는 거."

 

 

 

신의 자격과 기억을 잃어버리고 마신으로 격하되었던 신은,

인간에 너무 사랑한 나머지 인간에 대한 사랑을 버린 신은,

인간이 삶과 죽음을 사이에 두고 삶을 선택해주기를 바랐던 신은,

인간을 창조하고 사랑함으로써 자신도 그만큼 사랑받기를 원했던 신은,

아무것도 없던 태고의 시대에서 홀로 외로움을 느꼈던 신은,

 

처음으로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을 해주는 인간을 만났다.

그것은 지난날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구원이었다.

 

 

 

-

 

 

 

"저 마신이 왜 우는 거지?"

 

"로즈, 제대로 해명해."

 

"어머, 시안 오빠. 지금 날 의심하는 거야?"

 

"난 의심한 적 없어, 확신하고 있는 거지."

 

 

 

쌍안경으로 상황을 지켜보는 스페이드의 말에, 쉐도우는 바로 로즈를 추궁했다. 로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웃어보였다. 물론 그것이 쉐도우에게 통할 리는 만무했기에 로즈는 슬금슬금 자신의 오빠와 거리를 두었다. 평소에는 자신밖에 모르는 참 다정하고 착한 오빠인데, 이럴 때는 꼭 지옥에서 올라온 마물처럼 단호했고 또 무서웠다. 몇백 년 전에 오빠에게 처음 수학을 배웠을 때가 절로 생각나는 긴장감이었다. 쉐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로즈에게 더 무언가 말하려고 할 때, 아이가 테이블에 차를 내오기 시작하였다. 입가에 미소가 걸린 것으로 보아 로즈가 혼나지 않을 타이밍에 나와준 것 같았다. 로즈는 이때다 싶어 빈 쟁반을 들고 있는 아이의 오른팔에 어린아이처럼 매달렸다. 그리고 한 손을 눈가에 대며 우는 시늉을 했다.

 

 

 

"귀여운 여동생을 그렇게 의심하다니, 흑흑. 오빠 너무해."

 

"난 의심이 아니라 확신이라고 분명히 말했어."

 

"퀸에게 오빠가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동생을 괴롭힌다고 이를 거야!"

 

"귀여운 거 맞고! 사랑스러운 거 맞지만! 그렇다고 어물쩍 넘어갈 생각 없거든?"

 

 

 

제1작전이 통하지 않자 로즈는 퀸이 있을 곳으로 날아갔다. 아무래도 말해주기는 싫은 모양이었다. 쉐도우도 그것을 아니까 굳이 쫓아가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었다. 몇 백 년 전에는 로즈가 사고 친 일이 좀 많다고 하소연하는 일이 종종 있었기에, 이제는 익숙해진 스페이드는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래봤자 다음은 저 둘이 조커의 감시를 맡을 지역이니 곧 다시 만나겠지만 말이다. 스페이드는 다시 조커가 있을 곳을 바라봤다. 원래는 퀸의 관찰 구역이었지만 퀸은 오늘 있는 불꽃놀이를 주관하게 되어 바빠졌다. 하루 대역으로 온 스페이드는 조커의 숙소에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는 쉐도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쉐도우는 아이가 하는 로즈를 변호하는 말에 별다른 부정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끔가다 장난이 심한 것도 맞지만, 로즈가 착한 사람이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난 퀸 대신 하루 동안 저 친구들을 감시하러 왔지만, 너희는 여기 무슨 일이야?"

 

"그냥, 난 로즈가 오자고 해서."

 

"그렇구나, 그럼 저 상황은 로즈가 개입한 일인 거지?"

 

"어, 로즈는 마녀니까. 분명 우리가 모르는 걸 알고, 우리가 보지 못하는 걸 보는 거겠지."

 

 

 

이젠 볼일 없으니까 갈래, 잔을 비우며 하늘을 바라보던 쉐도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끝까지 보고 가는 건 어떠냐는 스페이드의 권유에 쉐도우는 솔로가 커플 사이에 있는 거 최악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나름 진지한 표정으로 하는 그 소리에 스페이드랑 아이가 웃었다. 그러고 보니 오빠는 짝사랑만 몇백 년 차라고 로즈가 쉐도우를 자주 놀리던 것이 떠올랐다. 어둠의 그림자지만 사랑에 약하구나. 스페이드가 주먹을 들어 올려 입 모양으로 작게 화이팅을 외쳤다. 쉐도우가 당황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으며 엉거주춤하다가, 자신은 그저 로즈를 데리러 가는 것일 뿐이라 말하고는 황급하게 발걸음을 옮겨 가버렸다. 정말 로즈만 데려간 것인지 후에 퀸이 로코를 품에 안고 스페이드 일행과 합류했다.

 

 

 

-

 

 

 

불꽃놀이를 배경으로 삼아 카드 게임이 시작했다. 카드의 짝을 맞춰 마지막에 광대 모양의 카드가 가지고 있는 사람이 패배하는 간단한 게임이었다.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시작한 게임이었지만, 여러 이야기가 오갔던 후라 분위기는 역시 어색하기만 하였다. 자기 자신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주제에 누군가의 트라우마를 끌어안고 나아갈 자신은 없었다. 불꽃놀이는 화려했지만, 지금 같은 상황이 오자 어지러웠다. 그럼에도 네게 먼저 손을 내밀었던 이유는, 내가 그걸 바랐기 때문에. 죽음 이외에 무언가를 바라는 일은 오랜만이라 익숙지 않았다. 그럼 내가 널 당분간 책임져야 하나? 생각해 본 적 없는 책임 의식이 팔을 쿡쿡 찔렀다. 소중한 사람의 곁을 스스로 떠난 멍청이에게 그런 용기가 있을까. 그때, 손에 잡힌 두 장의 카드 중에서 하나가 사라졌다.

 

 

 

"이번엔 내가 이겼지?"

 

"뭐야, 왜 네가 이겼지?"

 

 

 

거의 동시에 밖으로 나온 말에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손에 덩그러니 남은 카드가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지금까지 수많은 게임을 해왔지만, 누군가에게 진 것은 수백 년 만이었다. 아무리 운이 필요한 게임이라도 말이다. 사람은 적응하는 생명체다. 앞면을 알지 못하는 카드라도 상대의 표정이나 손에 얼마큼 힘을 주었는가, 처럼 주변을 살피면 어느 쪽이 정답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로또 같은 것이 아닌 이상 운도 경험으로 쌓을 수 있었다. 백 년을 함께한 친구들조차 게임이라는 분야에서는 결코 자신을 이기지 못했다. 자신도 전력을 다해도 그들을 못 이기는 분야가 있긴 했지만, 게임만큼은 이기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 당연한 것이 지금 너로 인해 깨졌다.

 

 

 

"와 이걸 졌다고, 내가 이걸 졌다고? 말도 안 돼."

 

"그렇게 억울하면 한 판 더 할래?"

 

"이건 억울한 거랑 느낌이 다르거든. 됐어, 봐준 셈 치고 한 판 더 해."

 

 

 

조커가 처음으로 권유한 다음 판에 츠바사는 저도 모르게 웃으며 화답했다. 그날은 불꽃놀이가 멈출 때까지 잠이 들지 않았다. 다음 날 늦잠을 자는 바람에 밖을 많이 돌아다녀 보지는 못했지만, 가끔은 이런 여행도 좋지 않을까. 잔잔한 호수에 누군가가 작은 돌을 하나 던진 것만 같이, 의무감으로 가득 차 있던 여행에 변화가 일렁였다. 그것은 오늘에 비하면 자잘한 것들이었기에 두 사람은 눈치를 채지 못했지만, 가랑비에 옷이 젖어가듯 자연스러운 변화였다. 그렇게 여기에 머무는 동안 많은 일을 겪었다. 그것은 분명 추억이라고 부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임은 확실했다. 모든 것을 마무리할 다음 왕국으로 향했다.

 

 

 

-

 

 

 

태초에는 10개의 왕국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왕국은 가치관과 생활 양식에 따라 나뉜 평범한 공동생활 구역이었다. 사람들은 성인이 되면 자유롭게 자신이 살아갈 터전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고, 세상의 질서를 지킨 만큼 자신이 원하는 대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신은 각국의 사이를 잘 중재하며 인간을 보살폈지만, 신이 추락하자 세상은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신이 자신들을 버렸다고 울부짖는 자들도 있었으며, 신에게서 독립할 때가 된 것이라 살길을 모색하는 사람도 있었다. 충돌하는 의견을 막아줄 사람은 없었고, 그렇게 전쟁이 시작되었다. 인간계로 추락한 신이 긴 잠에서 깨어났을 무렵, 왕국은 8개로 줄어들어 있었다. 기억을 잃은 신은 방황하던 자들의 무리를 따라 어느 왕국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평화를 이룩했다. 그곳은 후에 이 세계에서 가장 평화로운 곳이자 신을 모시는 성지가 되었다. 그 근방에 자리 잡고 있던 척박한 땅의 왕국은 자원을 이용한 무기 사업의 투자에 큰 성공을 거두어 큰 영토를 수립했다. 그곳은 후에 환경에 구애받지 않았다는 평가를 들으며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번에 가는 나라는 기술 개발에 모든 것을 쏟아부은 왕국이었다. 이 왕국은 척박한 땅이라 불렸던 옆 왕국보다 상황이 안 좋았다. 나라의 영토에서 지하자원이 단 하나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쟁으로 인해 땅이 황폐해져 농사를 짓기도 어려워지자, 나라가 살아남기 위해서 인적 자원을 활용해야 한다는 말들이 오고 갔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기술 개발의 중요성이 주목받았다. 그렇게 몇십 년이 지나자 지금은 그 어느 왕국도 따라잡을 수 없는 기술 대국이 되었다. 미래를 이끌어 갈 혁신 왕국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발전을 위해 나라 안의 단합을 도모했던 터라, 다른 왕국 간의 교류가 적었기에 다른 왕국을 이끌어 나갈 재목은 아니었다. 덕분에 혼자만 발전했다는 느낌이라 세 왕국을 연달아서 관광하면 조금 웃긴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여기 시끄러운데."

 

"그래도 여기가 가장 놀 거리가 많아."

 

"...우리 언제부터 놀려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된 거야?"

 

"그런 사소한 건 따지지 말고, 저긴 어때?"

 

 

 

처음 여행의 목적은 몇 달이라는 시간 속에 점점 흐려졌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잠시 잊고 지내는 것에 가깝지만 말이다. 다른 왕국과 비교하면 확연하게 높은 건물들이 눈에 띄었다. 거리에는 EDM 계열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의 옷차림은 전부 천을 많이 사용하지 않아 밋밋해 보이는 동시에 깔끔하고 단정했다. 적당한 옷으로 갈아입은 두 사람은 사람들 사이에 녹아들었다. 높은 건물과 주변에서 일렁이는 소음에 익숙하지 않은 츠바사가 주변을 지나치게 살피자 조커가 그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츠바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를 돌아보자, 조커는 눈짓으로 어느 건물을 가리켰다. 상앗빛의 밝고 따뜻한 느낌이 드는 건물이었다. 백화점만큼 거대한 규모는 아니었지만, 옷 가게나 만화 카페에 잡화점과 음식점도 있는 나름 갖출 것은 다 갖춘 건물이었다. 건물이 넓은 편이 아니라 한 층에 여러 가게가 일정 공간을 차지하는 형태로 운영되지만 말이다.

 

 

 

"우와, 이거 다 해봐도 돼?"

 

"우리가 어디 놀려고 돌아다니는 온 사람이었던가?"

 

"에이, 그런 사소한 건 따지지 말자고! 응?"

 

"알았어, 알았어. 자, 동전."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면 위와는 상반되는 어두운 남빛으로 물든 공간이 펼쳐졌다. 탁하지만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조명이 물결처럼 일렁였다. 가사가 없는 BGM은 거울에 비친 미러볼처럼 계속해서 미끄러졌다. 그래, 이곳은 네온 빛으로 철저하게 무장한 게임 센터였다. 드문드문 사람이 보이고 직원이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이곳을 방문한 다른 사람들의 말은 생각보다 크게 울리는 BGM에 묻혔지만, 게임 캐릭터가 일정 시간마다 내는 목소리는 선명하게 들려왔다. 인형 뽑기부터 리듬 및 격투 게임까지. 다양한 게임기들이 즐비하여 그곳에 시선을 빼앗긴 츠바사는 느끼지 못한 것 같지만, 조커는 이곳이 마치 아쿠아리움 같다고 느껴졌다. 이런 말 하면 의외로 기겁하지 않을까, 조커는 감상을 속으로 삼켰다. 이런 물 속이라면 계속 잠겨 있어도 좋을 것만 같았다.

 

 

 

"전부터 궁금했던 거 물어봐도 돼?"

 

"응, 물어봐."

 

"그렇게 오래 살았는데, 인생이 지겹지는 않아?"

 

"너무 오래 잠들어 있어서 그런가, 이래저래 신기해."

 

"나도 그냥 잠이나 잘까."

 

"...포기했어?"

 

"그냥, 한숨 푹 자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흐음... 앗, 떨어졌다."

 

 

 

화려한 효과음을 뒤로 하고 맥없이 떨어진 인형에 조커가 웃었다. 그리고는 츠바사 옆에 있는 인형 뽑기에 동전을 2개 집어넣었다. 이런 게임 센터의 인형 뽑기 집게는 상업적인 술수로 인형을 약하게 잡게 되어있다는 소문이 있다. 돈을 좀 쏟다 보면 어쩌다 강하게 잡아주는데, 그 이야기는 마치 게임 속 화폐를 대량으로 준비하고 비장한 마음가짐으로 장비 강화에 도전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런 약한 집게라도 인형의 택에 정확하게 걸린다면, 속절없이 인형을 유리 너머에 있는 사람에게 내어주는 수밖에 없다. 경험이 쌓이면 공략이 보인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인생도 하나의 게임처럼 보인다. 그 게임에는 길잡이는 있어도 정답은 없기에, 가장 잘 즐기는 사람이 승리자일 것이다. 조커는 뽑은 인형을 가볍게 츠바사의 품에 안겨 주었다. 상품은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다.

 

 

 

"봤냐, 내 실력."

 

"그거 어떻게 하는 거야?"

 

"이건 영업 비밀, 저쪽도 가보자."

 

 

 

리듬 게임은 전부 퍼펙트에 사격 게임은 체력을 닳지 않고 클리어, 농구 게임은 던지는 족족 골대에 들어갔고 격투 게임은 콤보가 끊이지 않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넋을 놓고 지켜볼 정도의 실력이었다. 다트 게임에서 가장 작은 면적을 맞추자 직원이 놀란 표정으로 박수를 쳐주었다. 저번에 진 카드 게임의 빚을 갚기라도 하려는 모양인지 조커는 분주하게 츠바사를 여러 게임의 앞으로 이끌었다. 게임은 잘하는 편이었지만 기계에 취약한 츠바사는 신기한지 이것저것 만져보다 게임 오버 되기 일쑤였다. 그런 츠바사에게 공략법을 설명해주는 조커는 이게 인간의 실력이라며 곧잘 으름장을 놓았다. 오랜 잠은 모든 것을 통달한 신을 무지하게 만들었다. 오늘은 이 무지한 신에게 새로움을 선사하는 날이 될 것이다.

 

 

 

-

 

 

 

식사까지 그곳에서 마치고 나니 밤이었다. 다른 왕국에서는 별들이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는데, 이곳은 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도시가 너무 밝았기 때문이었다. 텅 비어있는 하늘을 바라보면 느낀다. 기술 발전은 더 높은 수준의 문화를 가져왔지만, 사회의 삭막함과 공허함을 같이 가져왔다는 것을. 마치 끝없는 삶을 살아오면서 거의 모든 지식을 가지게 되어 세상에 공허함을 느낀 자신과도 같이 말이다. 건물에 붙어있는 커다란 전광판이 다양한 것을 비추고 광고했다. 옛날에는 그런 TV와 같은 것들을 바보가 되는 상자라는 뜻에서 '바보상자'라고 불렀다. 아이들의 시야를 밖으로부터 가리고,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말이다. 처음에는 이 여행이 인생을 정리하는 여행이라 느꼈다. 지금은 자신의 부정적인 면모를 모르는 척하는 여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스쳤다.

 

 

 

"넌 왜 나랑 여행 왔어?"

 

"너희가 등 떠밀었잖아."

 

"그럼 왜 안 도망갔어?"

 

"우리 친구 하자며, 네가."

 

"내가 여기서 더 어울려 달라고 하면 어쩔 거야?"

 

"어울려줄게."

 

 

 

숙소에 갈 때까지도 그들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정하지 못하였다. 여행이 끝나려면 더 남았으니까 그때 가서 생각을 해보자고 미루는 것이 고작이었다. 차라리 여행을 끝내지 말자는 이야기가 나왔으나, 그건 여행이 아닌 방황이기에 의미가 없다고 결론을 지었다. 그렇게 며칠을 여행하고 있으니, 다리를 관통하는 호수에 보름달이 떴다. 많은 사람이 오랜만에 크게 뜬 달을 향해 손가락을 들었다.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공간에서 호수에 비친 달을 보고 있던 조커랑 츠바사는 별이 없는 하늘은 좋은 하늘인가에 대해서 토론을 나누고 있었다. 조금은 철학적인 이야기겠지만 결론은 '알 수 없다' 라는 것으로 끝났다. 누군가는 이 도시처럼 기술 발전으로 새 삶을 찾았고, 누군가는 사라진 별처럼 기술 발전으로 터전을 잃었다. 무언가를 얻으려면 무언가를 잃어야 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니 할 말이 없어졌다. 처음 그에게 질문을 들었던 그 날처럼, 그렇지만 한 가지 알게 된 것이 있다.

 

 

 

"정말? 내가 그걸 핑계 삼아 물 속으로 널 끌어들이면?"

 

"같이 심해까지 들어가 줄게."

 

"너 죽을텐데?"

 

"너니까 괜찮아."

 

 

 

사람은 그 어떤 상황에서라도 더 나은 삶을 향해 나아갈 것이란 것을.

 

달이 아름다운 밤이었다.

 

 

 

-

 

 

 

호기심과 편리함을 위한 인간의 소망은 발명이란 결과를  만들어냈고 끝내 이것들이 모여 인류를 성장 시켜왔다.  증기기관과 전구와 같은 것들이 그랬고,  전화기나 유리가 그랬고, TV나 청소기 같은 것들이 그랬고,  로봇과 인공지능 같은 것들이 그랬다.  지식과 발전에 대한 인간의 욕심은 끝도 없었고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냈던 것을 하나하나 새로운 것들로 밀어내기 시작하였다. 도장 대신 전자 사인이, 팩스 대신 이메일이, 집 전화기는 이제 옛날이 되었고 스마트폰이라 불리는 작은 기계들이 이젠 사진기의 영역까지 들락날락하며 넘보고 있었다. 인류의 발전은 그만큼 빠르게 이루어져서. 인류와 비교하자면 거의 영생과 가까운 아주 오랜 시간을 살 수 있었던 어느 마신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너무나 달라진 세상의 모습에 적응하지 못하고 어영부영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질 정도였다.

 

 

 

"이번 여행 어땠어?"

 

"좋았어, 생각한 것 보다."

 

"자자, 그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게. 우리의 처음이자 최후의 게임을."

 

 

 

아하하, 한 소년의 웃음소리가 밤하늘 공기에 녹아들었다. 눈 앞에 있는 상대의 눈빛은 고요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반짝거렸다. 처음 그와 눈이 마주쳤던 날,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던 가을의 낙엽처럼 죽어있던 눈동자가 떠올라 감회가 새로웠다. 그때는 그가 자신의 말에 답을 내리고 자신을 찾아올 거라고 감히 생각지도 못했었다. 지금 그의 눈동자는 푸른 빛을 여과 없이 발산하는 보석을 닮은 달, 달맞이꽃을 탄생화로 가지고 있는 자신에겐 더할 나위 없는 사랑이었다.

 

 

 

"그럼 여기서 문제, 인류는 왜 발전을 꿈꾸며 살아왔을까?"

 

 

 

첫째, 그냥 그러고 싶어서.

둘째, 지구에서 인류만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에 고취되어서.

셋째, 기왕 사는 거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어서.

 

 

대답을 하기 전, 우리는 마주 보며 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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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 - 'B' Ending

 

Thank you for reading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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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onus : 잘 화해했습니다.

 

 

 

우물쭈물 거리는 태도부터, 시선을 회피하는 모습까지.

늘 상대의 우위를 점했던 이가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은 신선했다.

친구들의 웃음은 웃는 것이 아니었고, 조커는 나무로 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래서?"

 

"죄송합니다."

 

 

그 날, 몇 백 년 만의 갈등이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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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의 밑을 깨서 안에 들어있는 물을 새버리게 만들었다면, 물이 가득 차 있는 수조에 담가서라도 그 안을 채워줘야지."

 

"잠이나 자라. 달이 중천에 떴다."

 

 

 

마녀, 그들은 신이 만든 세계의 첫발을 내디딘 인간이었다. 그들은 영혼을 통해 환생할 수 있으며 신의 분신으로서 받은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는데, 그 힘은 전부 인과율에 기반이 된 것이었다. 본래라면 신이 세상을 직접 관리해주었기에 아무런 걱정 없이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아주 오래전 신이 인간을 사랑하기 포기하면서 상황이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전쟁을 일으킨 이유는 신의 부재가 원인인데, 신은 인과율에서 벗어난 초월적 존재다. 마녀들의 힘으로는 신이라는 존재가 만들어 낸 원인을 해결하지 못했고, 꼬일 대로 꼬여버린 인과가 마녀들의 힘을 점점 옥죄였다. 힘은 날이 갈수록 약해져만 갔고, 마녀라는 집단은 끝내 멸망의 위기까지 내몰렸다. 마녀들은 이대로 인간이 될 것인가를 의논했다. 이제는 시대가 변했기에 받아드려야 한다는 의견이 주류를 이룬 가운데, 그것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표를 던진 것이 바로 로즈였다. 먼발치에서 아름다운 사랑을 그리는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로즈는 만족스러운 듯이 웃었다. 신이 인간을 다시 사랑함으로써 이것으로 신의 부재로 인해 얽혀버린 인과는 서서히 풀리기 시작할 것이다.

 

 

 

"오빠도 참, 낭만이 없다니까. 가끔은 좋잖아, 이런 이야기도."

 

"네 덕분에 난 내일부터 당분간 종일 야근이거든?"

 

"그렇게 말하면 할 말 없네!"

 

 

 

시간을 관할한 마녀는 왜 신을 사랑이라 불리는 바닷속에 담갔을까. 그것은 옛날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였다. 신은 인간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자신의 사랑이 인간을 허무 끝의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신의 관점에서 한 이야기였다. 인간으로서는 신의 사랑만큼 이중적인 것은 또 없었다. 모두를 평등하게 사랑한다면 모두가 평등하게 특별하다면, 그것은 사랑이라고도 특별하다고도 볼 수 없었다. 그 당시 인간들은 신이 자신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사랑받고 싶은 인간들은 서로를 사랑했다. 특별해지고 싶은 인간들은 서로를 특별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연인이 생기고 가정이 생겨났다. 우애, 연애, 가족애 등, 사랑의 범위는 점점 늘어나고 종류는 점점 많아졌다. 시간을 다루는 마녀에게도 사랑이 있었다. 신이 내린 시련을 견디지 못해 죽을 위기인 가족이, 어렸을 적부터 자신을 이끌어주었던 가족이 있었다. 소중한 사람을 찰나로 남겨두고 영원을 살아갈 자신이 없던 그 마녀는, 소중한 가족의 영혼을 자신에게 귀속시키고 마을에 불을 내서 죽었다. 그 마녀는 죽기 전에 신을 울며 저주했다.

 

 

 

"오빠, 나 좋아해?"

 

"사랑해."

 

"그런 말은 퀸에게 해주는 게?"

 

"...야, 야, 로즈 너!"

 

"아하하, 농담이야."

 

 

 

마녀는 자신이 손에 잡은 행복이 영원하기를 바랐다. 소중한 사람이 아프지 않고, 자신의 눈에 닿는 곳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랐다. 그걸 위해 신을 기만한 마녀는 더 이상 신을 원망하지 않는다. 자신의 죄를 깨달았기 때문에. 그렇지만 후회는 없다.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대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고, 앞으로도 후회는 없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런 자신을 이기적이라고 할 것이고, 누군가는 이런 자신을 바보 같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나아가 사랑이라는 바다에 잠긴 신이 끝내 익사해 버려서,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무너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함께하고 싶은 가족이 있으니까,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가족이 있으니까. 마녀는 그런 미래 속에서도 자신의 행복을 선택하였다.

 

마녀는 바닷속에 가라앉은 깨진 유리병이 무사하기를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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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 - 'B'roken Ending

 

Thank you for reading 'the tru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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