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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시안 - 동화합작

Z&E&W 2021. 4. 15.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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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샘추위였을까, 아직은 추운 어느 날의 일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송이가 떨어질 것 같은 하늘을 당당하게 마주 보며, 작은 연분홍빛의 꽃잎이 세상에 얼굴을 내밀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그 꽃잎을 바라보며, 드디어 겨울이 가고 봄이 왔노라 말했다. 그러나 몇 날, 며칠이 지나도 그 꽃봉우리는 활짝 피어나지 않았고, 사람들은 피지 않는 꽃에 의문을 가졌으나 원인을 알아내지는 못하였다. 그저 이번 해는 꽃이 늦게 피려나 보다,라며. 무신경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래, 아마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언제나 평화로 가득하던 어느 공원에 울음 섞인 한탄 소리가 드문드문 들리던 것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그 소리가 바람에 천천히 묻혀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





[ 잭시안 - 잠자는 벚꽃속의 앨리스 ]





오늘은 쉐도우가 사라진지 정확하게 1달이 되는 날이었다. 그동안 여러 곳을 돌아다녔고 무작정 정보를 모았으며, 수많은 것들을 물어보았지만. 사건 당일, 어느 한적한 공원에서 연분홍빛의 벚꽃이 바람을 타고 흩날렸다는 것 외에 아무 정보를 얻지도 보지도 듣지도 못하였다. 원래라면 쉐도우와는 관련이 없을 것이라 여겼을 정보였지만, 그 당시 꽃을 피운 나무는 전 세계에 한 그루도 없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일임에는 분명 사실이었다. 아무런 흔적도 말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그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던 조커는, 사건을 처음부터 뒤쫓기로 결심하고 이 공원에 발을 들였다.




"네가 사라진 날, 유일하게 꽃을 피웠던 나무라니."




나무는 언제 꽃을 피웠냐는 듯, 앙상하고 비어있는 가지만이 덩그러니 하늘을 향해 뻗어있었다. 한적한 공원에 내려오는 따스한 햇살, 주변 사람들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평화를 만끽했다. 근처 노점에는 길거리 음식을 먹으려는 손님들로 북적였고, 근처 호수에는 데이트하는 커플들이 줄을 지었다. 꽃이 피었으면, 더 보기 좋았을 것이라 무심코 생각하던 조커는 이내 이질적인 울음소리에 주위를 살폈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몇 번을 두리번거렸을까, 저 멀리 홀로 벤치에 앉아 고해성사하듯 울음을 토해내는 그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그 사람은 미안하다고, 울음이 섞여있지만 상당히 큰 목소리로 같은 말을 되내고 있었다. 왜 이때까지 눈치채지 못한 건지 의문이 스칠 정도로, 그 소리는 조커의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멍하니 그 사람을 바라보던 조커는 무언가에 이끌려가듯, 그 사람에게 다가가 물었다.




"…저기."


"신데렐라였어요, 제가 고른 책이요."


"에, 신데렐라?"


"3주전이었죠, 처음으로 그녀와 연락이 끊겼던 날이. 그래, 벚꽃잎이 아름다웠던 날이었네요."


"잠깐만, 꽃잎이 휘날렸다니? 올해 봄은 분명…!"




조커는 그 사람 옆에 앉으며 말을 걸었고, 그 사람을 울며 조커를 붙잡고 심정을 토로했다. 아무도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다며,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며, 사정까지하는 그 사람을 조커는 차마 무시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말한 사실은 놀라웠다. 꽃잎이 아름다웠던 날 사라진 연인, 꽃이 만개한 날 사라졌던 쉐도우와 똑같은 원인으로 실종된 거라고,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경찰이 그러더군요. 인정하고 싶지 않아 여기에 왔습니다. 벚꽃이 저를 그녀에게 인도해 줄 거라고 믿으면서요."


"…"


"그렇게 돌아다니다 낡은 동화책을 한 권 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꿈에 그리던 그녀를 만났죠."


"그런 잘 된 거 아냐?"


"네, 모든 것이 완벽했습니다. 마지막에 그녀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제외하면요."


"그건 무슨 말이야?"


"애석하게도 인생은 동화 같지 않더군요."




꽃잎과 함께 사라져, 꽃잎과 함께 나타난 사람. 동화 같은 만남이었고,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냈으나, 그 결말은 전혀 동화 같지 못했다고. 견우와 직녀보다 더 비참한 개 현실이라는, 그 사람이 하는 말은 들으면 들을수록 지극히 비현실적이었다. 심지어 어딘가 소름 끼치는 느낌도 들었다. 마치 '너도 곧 나처럼 후회하게 될 거야.'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조커는 자신을 붙잡은 그 사람의 손을 조심스레 떼어내었다. 눈앞의 그 사람을 허탈하게 웃더니, 손으로 중앙광장을 가리켰다.




"당신도 사람을 찾으려고 여기 왔을 테죠?"


"…당신이 그걸 어떻게."


"그야 세상 사람들은 제 말을 믿어주지 않았으니까요. 들어보려 하지도 않았죠."


"나도 당신 말을 완전히 믿는 건 아니야."


"상관없어요, 당신은 내 말에 관심을 가졌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복잡한 심정이 들어 올려다본 하늘에는 어느새, 그 무엇보다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 평소였으면 어디라도 좋으니 여행길에 올랐을지도 모르는 날씨였지만. 오늘은 왜인지 저 태양이 방관자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몇 시간이 사죄하며 한탄하던 그 사람의 목소리를, 끝내 듣지 못하고 지나치는 주변 사람처럼 느껴졌다. 자신 역시 남들에게 닿지 못할 한탄만 내뱉는 미래만이 남은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용납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생각만이 들었다.




"저기 가봐요, 당신도 소중한 사람을 잃었으니 여기 온 거 아닌가요? 가서 멋진 동화책을 고르세요."


"그럼 당신은 이제부터 어떡할 거지?"


"그녀랑 약속했습니다. 봄이 오는 날, 자신을 보러 와달라고. 약속을 지키려면, 악착같이 살아야겠지요."


"응, 그게 좋네. 생명은 보물 같은 거니까, 소중히 해."


"당신은 저와 다른 선택을 했으면 좋겠네요."


"고마워, 당신에게도 기적이 일어나길."




조커는 일어나서 중앙광장을 향해 걸어갔다. 아까는 들리지 않은 수많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바스러질 것만 같은 목소리들이 바람에 묻혀 사라져갔다. 무신경하게 웃으며 지나가는 주변 사람들에게서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방금의 자신처럼, 울고 있는 저들의 존재를 아예 눈치채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내, 저 사람들도 모두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잃고 절망하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쉐도우, 너 대체 어디로 간 거냐."



조커의 나지막한 목소리도 바람에 묻혀 힘을 잃었다.




-




"어서 와, 학생! 요즘 날씨 참 따뜻해졌지?"


"…학생이라니, 나?"


"그래! 이런 날에야말로 꽃이 활짝 펴야 되는데 말이야. 학생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글쎄, 그것보다 여기서만 팔고 있다 들은 물건이 있는데. 혹시 아는 거 없어?"


"아하하, 고 녀석 참."




중앙광장은 여러 노점과 큰 분수대, 커다란 벚꽃나무와 북적이는 사람들도 가득했다. 구석에 위치한 파스텔톤의 작은 노점,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넉살 좋게 웃으며 조커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자신이 여기 올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던 것만 같았다. 조커 역시 특유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노점 주인을 상대했다. 방금 만난 사람의 말에 따르면, 이곳에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노점 주인은 가볍게 웃어 보이더니, 깔끔하게 생긴 동화책 꾸러미들을 내밀었다.




"꽤 비싼 물건이라고, 이거."


"보물보다 비싸나?"


"그럼! 그걸 말하라고 하나?"


"에, 생각보다 평범한데?"


"평범해 보여도 한 권만 팔아줄 거야. 그게 원칙이거든."




따뜻하고 예쁜 파스텔톤의 깔끔한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밝은 햇빛 아래에서 그것들은 자신의 가치를 더욱 자랑하려는 듯, 세상을 여러 가지 색으로 물들였다.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 인어공주부터, 거짓말을 놓지 못한 피노키오까지. 낯익은 동화책이지만, 어딘가 조금 낯선 기분도 들었다. 원래 이렇게 끝나는 동화였던가? 조커는 천천히 그것들을 살펴보았다. 그런 신중한 태도가 재미있었는지, 노점 주인은 호탕하게 말을 이었다.




"너도 사람 찾으로 온 거지? 너랑 비슷하게 생긴."


"…쉐도우를 알아?"


"알다마다! 여기서 책을 한 권 사 갔거든!"


"쉐도우가? 어떤 책이었는데?"


"분명,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였지."




노점 주인은 책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앨리스가 그 어떤 비현실적인 상황을 마주하더라도, 결국 무사히 집에 돌아간다는 행운의 이야기란다. 그토록 호기심 가득하게 쫓았던 하얀 토끼를 붙잡지 못한 건 정말 아쉬운 일이지만 말이다.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자기 멋대로 해석한 듯했지만, 중요한 부분은 아닌 것 같으니 다른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중요한 점은 한 달 전쯤에 여기서 그걸 사가지고 갔다는 것. 그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쉐도우가. 전혀 납득이 가지 않았기에 조커는 인상을 조금 구겼다.




"그 녀석이 왜 그걸 사 갔는데?"


"벚꽃잎이 아름다웠으니까, 그렇게 말해둘까."


"만나는 사람들마다, 죄다 알 수 없는 이야기들 뿐이네."


"그런 궁금증을 '사랑'으로 극복하려고 온 게 자네 아닌가?"


"저기 아저씨, 나 솔로거든?"




조커가 투덜거리며 부정의 의사를 보내자 노점 주인은 그저 웃었다. 그러면서 꾸러미 속의 책을 뒤적거리더니, 연보랏빛의 책을 한 권 건네주었다. 조커는 그것을 받아들었고, 이내 책 위에 떨어진 연분홍빛의 벚꽃잎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텅 빈 하늘만이 조커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어디서 떨어진 꽃잎인 걸까. 그 모습을 본 노점 주인은 책꾸러미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학생에겐 그게 어울려."


"나 학생 아닌데."


"아무튼 말이야."


"…이 책, 잠자는 숲속의 공주네."


"동화 같은 사랑에 시련은 필수잖아?"


"역시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이거 정말 도움 되는 거 맞아?"




조커는 동화책의 페이지를 빠르게 넘겼다. 이웃나라 공주님과 정략 혼약이 잡힌 왕자님이, 우연찮게 숲속에서 만난 처음 보는 아가씨와 깊은 사랑에 빠졌으나, 마지막에는 그 아가씨가 자신과 혼약이 잡힌 공주님이라는 걸 알게 되어, 마녀로부터 공주님을 구하러 가는 상당히 고전적인 사랑 이야기였다. 무기로 쓰기에 적당한 크기나 두께도 아니고, 내용이 특별한 것도 아니다. 도움이 될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물론. 마녀는 시련이야, 지금 자네들이 겪는."


"…쉐도우였으면 화냈을 거야, 지금 그 발언. 그리고?"


"왕자님은 자신이 걸은 길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해. 숲속에서 왕궁으로 돌아간 것처럼, 그렇지 않으면 숲속에서 길을 잃어버리지."


"그럼 공주님은?"


"공주님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 봐, 왕궁에서 태어나 왕궁에서 왕자님과 사랑을 성사하잖아."


"좋아, 이 책으로 줘."




노점 주인은 책을 계산해 주면서, 벚꽃이 만개하는 날 새로운 인연을 만날 수 있는 장소라며 산책로를 가리켰다. 또 사실 이거 전부 당신이 꾸민 일이 아니냐는 조커의 물음에, 자신은 자네가 계산한 이야기에 나오는 3명의 요정 같은 존재일 뿐이라 말하였다. 왕자님이 공주님을 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공주님이 왕자님을 만나기 전까지 무사할 수 있는 - 조커는 믿을 수 없다는 뉘앙스의 대답을 남기고는, 이내 책을 들고 한적한 산책로로 발걸음을 옮겼다.




-




산책로를 그저 걷고 있던 도중, 돌연 세찬 바람과 함께 흩날리는 벚꽃잎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꽃이 피어있을 리가 없는데, 활짝 만개한 꽃잎들이 춤추듯 하늘로 떠올랐다 바닥으로 원을 그렸다. 조커는 주위를 둘러보며 상황을 살폈고, 이내 주변 사람들이 전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언가 이상해, 머릿속에서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외쳤다. 노점 주인이 사기를 친 거라는 불만과 함께, 조커는 중앙광장으로 발걸음을 돌리려 했다. 만개한 벚꽃 사이에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기 전까지. 조커는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서있었다. 이윽고 상대도 자신을 발견하곤 움직임을 멈추었다.




"어라, 쉐도우?"


"…조커? 왜 네가 여기에 있어?!"


"그건 내가 할 말이거든! 지금까지 어디서 뭐 했어?!"




드디어 그동안 찾고 다녔던 사람을 만났는데, 예상했던 반가움보다는 울컥한 마음이 먼저 치밀었다. 이것도 분명 반가워서 나오는 감정이니라. 만나면 하고 싶었던 말이 정말 많았는데, 목에서 막혀 나오지 않았다. 언성이 높아지려는 걸 간신히 참아내고 있으나, 그럴수록 표정관리가 점점 힘들어져서. 조커는 그만 고개를 숙여버리고 말았다. 오랜만에 만나서 이런 모습,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는데. 쉐도우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런 조커의 등을 몇 번 토닥이더니, 이내 손목을 잡고 앞으로 이끌었다. 햇빛이 밝은 어느 봄날의 일이었다.




"이건 전부 한 달씩이나 사라진 네 탓이야."


"오랜만에 만나서 하는 이야기가 고작 그거냐?"


"고작이라 하지 마, 진짜 가만 안 둔다 너."


"…그렇네, 사실 로즈가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그것참 아쉽네, 네가 바라던 사람이 아니어서."


"그 반대야, 네가 와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어."




로즈는 가족이니까, 당연히 쉐도우를 찾아다니겠지만 조커는 아니라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였다. 평소 그답지 않게 쉐도우는 꽤나 기쁜듯한 표정을 하고 있어서, 조커는 그 표정에 괜시리 멍해져버리고 말아서, 부족함 투성이였던 쉐도우의 말에 반박하지는 못했다. 이럼 불만은 마음속에 꼭꼭 감추어두고, 조커는 투덜거리면서도 쉐도우의 말에 집중했다. 그러자 쉐도우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자신이 지난 한 달 동안 무엇을 해왔는지, 왜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


한 달 전, 세상이 피지 않는 꽃으로 떠들썩할 시절.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잎이 이질적이어서, 조사차 이곳에 들렀다고 했다. 그리고 어찌 된 일인지 이곳에서 탈출할 수 없었다고.




"노점 주인아저씨가 그러더라. 넌 흰토끼일 뿐이니까 허튼짓은 그만두라고."


"그래, 이런 일이 있을 것 같으면 얌전히 집이나 가라고."


"가려고 했어, 이곳으로 길을 잘못 들었을 뿐."


"하, 지금 그걸 핑계라고. 좀 더 조심하란 말이야."


"알았어, 명심하지."


"그보다 네가 흰토끼면 앨리스는 누구야? 아, 설마…"


"그래, 나도 너라고 생각해. 너, 나 때문에 여기에 온 거니까."


"…그거, 너랑 같이 여기서 나갈 수는 없다는 뜻이 되는 걸까. 그건 더 싫은데."


"글쎄, 아마도. 너는 무슨 책 추천받았어?"




조커는 방금 전에 계산한 책을 보여주려다가, 방금까지만 해도 손에 잘 들고 있던 책이 없어진 걸 깨달았다. 손에 남은 건 한 줌의 벚꽃잎들 뿐이었고, 이마저도 선을 펼쳤을 때 바람에 흩날려 저 멀리 사라졌다. 비현실적인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난 탓에,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책의 내용을 미리 한 번 살펴봐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 또한 언젠간 도움이 되리라. 조커는 간단하게 아까 노점에서 들은 이야기들을 말해주었고, 쉐도우는 무언가 생각하는듯하더니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응, 모르겠어."


"당당하게 한다는 말이 그거냐?"


"어쩌라고, 전혀 모르겠는데."


"하여튼 내가 또 버스 태워줘야겠구만~."


"네네, 헛소리는 됐고. 일단 여기 좀 둘러보지 않을래?"




조커가 잘 모르겠다는 쉐도우를 보며 장난스레 키득거렸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습 그대로였다. 오랜만에 만난 것 같은데, 어제도 만난 것처럼 친근했다. 이런 게 친구라는 거겠지. 유달리 눈부신 햇빛을 따라, 유달리 상쾌한 바람을 따라, 생각보다 넓고 기다란 산책로를 걸어가면서. 두 사람은 만개한 벚꽃보다 즐겁게 이야기꽃을 피워냈다. 요즘은 뭐가 유행하는지, 어제 TV에서 무슨 방송을 했는지, 저녁으로는 무엇을 먹었는지, 다른 친구들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소소하면서도 평화로운 일상이 두 사람 사이에서 오고 갔다. 사람은 무슨, 벌레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깨끗한 거리.


첫눈처럼 떨어지는 벚꽃잎을 잡아보기도 하고, 머리에 묻은 꽃잎을 서로 털어내주기도 하며, 두 사람은 여느 때보다 활기차게 웃고 있었다.



♪♬~ ♬♩♪~~ ♪♬♩♩~



술래잡기하듯 노닐던 두 사람은 어느덧 길의 끝에 다다르고 있었다. 길었던 산책로가 끝나자 작은 거리가 그 모습을 들어냈다. 조그마한 가게들이 줄지어 서있었고, 버스킹 음악들이 거리 곳곳을 뛰어다녔다. 사람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지만, 오히려 사람이 없었기에 두 사람은 두 사람 마음대로 행동하고 돌아다닐 수 있었다. 이곳저곳을 더 살펴보던 그들을 마치 들어오라는 듯이 열려있는 가게를 발견하곤 조심스럽게 발을 들였다. 화려한 모자들이 진열된 가게. 벽에 걸린 메뉴판에는 다양한 스위츠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고, 유리 케이스에 메뉴판에서 본 음식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어떤 사람이 여기를 방문해도 감탄을 하고, 눈길을 줄 만한, 정말이지 훌륭한 외관들이었다.




"모자 장수의 티파티일까?"


"그럴지도."


"아, 쿠키는 무료래!"


"뭐, 가져가게? 이상한 거면 어쩌려고…?"


"한 봉지 정도는 괜찮아, 괜찮아~."




조커는 진열된 쿠키 꾸러미를 하나 집어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붉은 리본으로 심플하게 묶여진 손바닥 크기만 한 쿠키 꾸러미 안에 들어있는 쿠키는 전부 공들여서 만들어진 수제 같았다. 쉐도우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않는 눈치였으나, 조커는 내키지 않고 다른 가게들도 기웃거려보았다. 아예 문이 열리지 않는 곳도 있었고, 문을 열고 들어가도 무언가를 판매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은 곳도 있었다. 신기하면서도 텅 빈 거리는, 왜인지 쓸쓸하게 느껴졌다. 햇빛과 음악만으로는 이 거리의 가치를 온전하게 살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또 유유자적 길거리를 걷고 있을 때였다.




"이제 다른데 가보자!"


"…"


"…쉐도우?"




들려오지 않는 대답에 불안감을 느낌 조커가 시선을 돌렸다. 아무도 없는 거리에 퍼지는 거리음악은, 아까와는 달리 어딘가 애달픈 느낌마저 들었다. 주변을 둘러보며 쉐도우를 찾던 조커는 유달리 꽃이 피지 않은 벚꽃나무를 발견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이 위태로운 꽃나무 아래에서, 조커는 작은 고양이를 발견했다. 칠흑같이 어두운 털은 무척이나 부드러워 보였고, 호박처럼 깊고 아름다운 눈은 마치 달처럼 빛났다. 색 조합이 쉐도우같다고 느끼면서도, 고양이라는 걸 확인한 조커는 어느샌가 조금씩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히익… 고양이는 질색이야…!"




야옹, 고양이는 부드럽고 풍성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조커에게 다가왔다. 조커는 그런 고양이의 행동에 놀라 빠르게 자리를 피하려고 했고, 고양이는 자신을 피하는 조커를 바라보며 고개를 한 번 갸웃거렸다. 그리고 해맑게 조커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몇 분을 그렇게 대치했을까. 조커가 고양이를 피해 이곳저곳 다니다 낡은 책방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자 고양이는 만족한다는 듯, 제 모습을 감추어 사라졌다. 마지막에 본 고양이의 기분 나쁜 웃음이 계속 눈에 밝히는 것 같다고 생각해, 조커는 고개를 두어 번 저었다.




"날 여기로 데려오고 싶었던 걸까… 뭐야, 여긴…?"




조커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찬란한 햇빛이 인상적인 오후 12시가 조금 넘은 시간, 이상할 정도로 어두운 내부에 조커는 벽을 더듬었다. 활발하게 울려 퍼지던 거리음악이 스피커에 고장이라도 난 것 마냥 지지직거리더니 멈추었다. 어디에서 오는 건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가게 안에 불이 들어오자 조커는 책방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고 아무리 힘을 주어도 열리지 않자, 갇혔다는 생각이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본능적으로 머리를 굴리면서 뒤를 돌아보았고, 깔끔하게 정리된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벚꽃나무 아래에서, 책방에 있던 책들은 전부 똑같은 하나의 책이었다. 조커는 망설임 없이 그 책을 펼쳤다.


옛날 옛적 어느 마을에, 서로를 정말 사랑하는 두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미래를 약속하고 영원히 행복할 것만 같았던 그들을 갈라놓은 건,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의 노여움이었습니다. 신의 이름을 빌려 부정부패를 저지르던 마을에 진절머리가 난 수호신이 마을을 봉쇄하고 고립시켰던 것이었습니다. 진노한 수호신의 기분을 풀어드리려 마을 사람들은 다양한 제물을 바쳤고, 그중에는 평범하게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던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청년의 연인은 밤낮으로 신께 용서를 구했고, 신은 그런 연인의 목소리를 들어 청년을 벚꽃나무로 다시 태어나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연인에게 말했습니다. 자신이 바란 것은 제물 따위가 아니었으며 - 이 나무가 다시 사람의 모습을 되찾는 날, 이 부패한 마을에 구원을 내리겠다고.


조커는 가볍게 책을 닫았다. 이 책처럼 여기는 소중한 사람을 잃은 사람들이 신께 간청하는 장소인 걸까. 그래서 자신도 누군지도 모를 신에게 시험받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아니, 쉐도우는 살아있는 사람인데 왜 자신이 여기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거지? 설마 한 달 전에 그는 이미…! 조커는 자신은 왕자님이 공주님께 가는 길을 도와주는 요정이라는 노점 주인의 말을 떠올렸다. 자신이 계산했던 책, 그것이 이번 사건을 해결할 열쇠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책방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그때였다 -


책방에 있던 책장들이 하나둘씩 무너졌고, 수많은 책들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아무리 힘을 주고 밀어보아도 열리지 않는 문을 뒤로하고, 순식간에 무너진 책 더미 사이에서 조커는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잎을 보았다. 연분홍빛으로 흩날리는 그 꽃잎은 손을 뻗어도 닿지 않았다. 그 속에서 어렴풋하게 쉐도우, 너를 본 것도 같았다.




-




"…야! 조커!"


"…어, 어!"


"너 괜찮냐? 갑자기 쓰러져선…!"


"어, 내가?"




벚꽃잎이 하나, 조커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그와 동시에 정신을 차린 조커가 어리둥절하며 눈앞의 상대를 바라보았다. 쉐도우는 그제서야 안심했다는 듯, 모르는 곳에서는 조심해서 다니라며 잔소리를 퍼붓기 시작했다. 조커는 잔소리는 사양이라는 말과 함께 귀를 막는 시늉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평범한 공원의 어디에나 있을 법한 벤치에 앉아있었다. 활발한 거리음악이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조커는 고양이가 앉아있던 나무를 바라보았다. 눈에 띄게 앙상했던 나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벚꽃이 만개한 채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저기서, 고양이를 봤어."


"…그거 혹시, 앨리스에 나오는 그 고양이 아냐?"


"그러려나, 동화에 나온 것과는 색이 달랐는데 이상하지."


"이상한 일이면 이미 널리고 널렸잖아? 정신 차렸으면 가자."


"에, 어디로?"


"슬슬 시간이 된 것 같아서, 가보면 알아."




쉐도우의 손에 이끌려 간 곳은 공원의 생태체험학습장이었다. 커다란 호수가 있다고 유명해진 곳이기도 했다. 소풍을 온 아이들이나, 호숫가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이 많았던 장소이기도 하다. 햇빛으로 인해 푸른빛으로 반짝거리는 물결이 아름다웠다. 물방울 하나하나가 작은 보석 같았다. 조커는 눈을 빛내며 주의를 둘러보았다. 왠지 모르게 들떠서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순간적으로 놀라 눈을 질끈 감은 순간, 이질적인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았다. 마치 책장에서 책이 무너지는 듯한, 아까 책방에서 들었던 것과 같은.




"기묘하고 신기한 일을 겪더라도 앨리스는 무사히 귀환할 것이다, 이 말 기억해?"


"어, 그거 노점 아저씨가 해줬던 말인데…"


"축하해, 이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갑자기 무슨 말이야, 너는? 우리 함께 돌아가는 거 아니었어?"


"아쉽지만, 흰토끼에게는 여기가 집이잖아."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쉐도우는 쓰게 웃었다. 조커가 여기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시계의 바늘은 12시를 가리킨 채 움직이지 않았었다. 기적이 일어난 거라 믿었다. 하지만 조커가 고양이에게 홀려 정신을 잃은 뒤, 멈춰있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기적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아주 잠깐이었던 유희는 이제 끝이 났다. 이미 자신이 처음 왔을 때부터 반쯤 무너지고 있던 이 세계는, 얼마 안 가 사라질 것이며 앨리스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것이 자신이 고른 책의 결말. 크게 괴로운 기억 없이 조커가 무사히 돌아간다면, 그것만큼 기쁜 일은 또 없을 것이라고. 쉐도우는 숨기고 있던 책을 내밀었다.




"이거 너 줄게, 들키면 목이 달아나겠지만."


"그거 하트 여왕 이야기?"


"걱정 마, 왕이 사면해 줄 테니. 동화책에서처럼."


"이젠 됐어. 이 영문도 모를 곳, 같이 나가자."


"아니, 같이 갈 수는 없어. 앨리스를 위해 흰토끼가 보여줄 수 있는 이야기는 이제 끝이 났거든."




쉐도우는 고개를 저어 보이더니, 어느새 자신의 한참 앞에 서있었다. 살짝 과장된 몸짓으로 몸을 빙글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그 금빛 눈동자에, 지금까지 외면하고 있던 불안감이 등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아아, 그래. 이건 그 사람이 말했던 선택인 거구나! 신데렐라를 고른 그 사람은 끝내 해피엔딩을 찾아내지 못하고, 혼자만 현실로 나온 것이다. 꿈보다 잔혹한 현실에서 그저 봄이 오고 꽃이 피어나길 기다린 것이다. 그런 것이라면,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걸까. 자신도 그 사람처럼 단순히 봄이 오고 꽃이 피어나기를 기다리면 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역시 이 모든 것을 용납할 수가 없어져서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봄이 오고, 꽃이 피면. 오늘처럼 만나러 와 줄 거지?"




그렇게 말한 너는, 벚꽃잎이 바람에 아스러지듯이 사라졌다. 잡으려고 쫓아가봤지만, 손에 잡힌 한 줌의 벚꽃잎들이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비웃음 당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아아, 눈앞에 빛이 쏟아졌다. 저 멀리 공원을 방문한 수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그래 이 앞에 존재하는 것은 차가운 현실이었다.


현실보다는 여기가 좋다,라는 어린아이 같은 고집은 부릴 수 없었다. 소중한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널 잃은 걸 납득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도움을 청할 사람도,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도 없는 이런 무력감, 네가 과거에 느꼈던 기분이 이런 것일까. 과거에도 지금도, 자신에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던 네가 너무나도 야속해졌다. 그 사람에게 말해줘야지. 영원히 피어나는 꽃잎은 없었노라고 -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려 했을 때였다.


툭 - 책이 한 권 떨어졌다.


그것은 쉐도우가 준 책이 아니었다.

자신이 계산했던 바로 그 책이었다.




"이건, 분명…"




조커는 조심스레 책을 주워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마지막 장에 도달했을 때, 조커는 자신의 앞을 바라보았다. 빛 속의 사람들은 평화로운 듯이 웃고 있었다. 이질적인 울음소리는 이미 묻혀 사라진지 오래였다. 여기서 나가면 자신의 목소리도 저 평화에 묻혀버리겠지. 그곳을 진짜 평화라 부를 수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책의 표지를 한 번 바라보더니 이번에는 뒤를 돌아보았다. 분명히 낮일 텐데, 무척이나 어두웠다. 활발하게 울려 퍼졌던 거리음악은 이제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이 세계의 종말을 알리려는 듯이.




"그렇네, 네 이야기는 끝난 모양이야."




빛을 등지고 망설임 없이 어둠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네 이야기가 끝났다면, 내 이야기로 이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왕자님은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돌아봐라. 공주님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으니, 자신을 돌아보면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기다려, 금방 만나러 갈게. 조커는 작게 중얼거렸다.


앨리스의 목을 베어라, 앨리스의 목을 베어라.


이질적으로 활기찬 버스킹 음악과 함께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종말을 고하는 동화 속 여왕님의 웃음소리겠지. 하지만 이제는 무섭지도 두렵지도, 하물며 불안하지도 않았다.




-




작은 상점들이 있던 거리는 어느새 가시나무로 둘러싸여 있었다. 뾰족한 가시들이 상점의 입구를 막았고, 나무를 타고 점점 자라나고 있었다. 산책로로 향하는 길이 막혀버리지 전에, 조커는 가볍게 가시덤불을 피하며 자신이 왔던 길을 되짚었다. 산책로는 불에 타고 있었다. 꽃잎 대신 재들이 하늘 위로 떠오르면 바닥으로 원을 그렸다. 나무들이 하나둘씩 쓰러져 앞길을 막았다. 먼지 구름이 시야를 가렸지만, 괴도에게 이 정도 시련은 경찰을 따돌리는 걸보다 간단한 일이었다.




"이상하다, 쉐도우랑 만난 곳은 여기인데…"




늦은 건 아니겠지, 조커는 필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활활 불타오르는 나무의 연기를 따라, 하늘은 황혼빛으로 물들어갔다. 쓰러지는 나무들을 피해 달리던 조커는, 어느새 중앙광장에 다다르고 있었다. 쉐도우를 만났던 장소에 도착했음에도 그를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이 신경 쓰여 참을 수 없었다. 자신 있게 내디뎠던 첫걸음이 무색하게, 끝없는 불안감은 서서히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속도가 점점 줄어들어, 중앙광장에 도착했을 때, 등을 타고 흐르는 무력감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어떤 선택이 옳은 선택이었던 걸까, 쉐도우."




나는 어떻게 해야 해? 대답 없는 물음을 하늘에 던졌다. 어느덧 떠오른 밝은 보름달이 조커의 앞길을 비추었다. 가로등도 천천히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니 네가 활동하는 날은 항상 보름달이었지, 쉐도우. 그렇게 멍하니 달을 보고 있다가 알 수 없는 위화감에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이 뒤를 보고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시간이 빠르게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을 돌아보는 일은 결국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도와준다고, 그런 기분이 들자 더 이상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자신은 맞게 가고 있는 거라 믿는 것이 최선이었다. 후회를 할 거면 최후의 끝에서 하자고 결심했다.


모든 것을 바로잡고 나아가자.


급할수록 돌아갈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라는 말이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출발 지점을 알아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도착지점을 바라본다면 그토록 바라던 옳은 길이 보일 것이라 믿었다. 평소보다 남들보다,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간절하게 바라던 이상적인 미래에 도달할 수 있다면 - 그렇게 조커는 오늘 하루라는 과거를 되돌아보았다. 모든 일이 시작한 장소, 그건 너를 찾겠다는 마음을 먹고 발을 들인 이곳 공원의 입구가 아닐까. 문득 네가 거기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전의 자신이 달려나갔던 것처럼. 목표가 생기니 한치의 불안감도 없이 일어나 끝을 향해 달려나갈 수 있었다.




"이 정도면 꽤나 멋진 왕자님이지 않아? 요정씨."




광장을 가로질러 도착한 입구, 어느덧 밝은 햇살과 따스한 바람만이 조커를 반겨주었다. 자신은 신의 시험마저 통과한 거라고. 앙상한 나무들 사이의 작은 벤치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세상 평화롭게 졸고 있는 쉐도우를 발견하곤 그만 웃어버렸다. 그 웃음소리에 네가 눈을 떠버린 건 예상 밖의 일이었지만 말이다. 꽤나 놀란듯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자신을 바라본 네가 어째서인지 꽤나 사랑스러워서, 조커는 능청스레 쉐도우의 옆에 앉았다.




"이런, 벌써 일어났어? 낭만을 모르는 공주님이네."


"…뭐야, 무슨 일이 있던 거야?"


"글쎄, 공주님과 왕자님의 해피엔딩! 이랄까~."


"하아? 내가 왜 공주 역할인 건데!"


"그런 사소한 건 동화책에게 따져."




조커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리더니, 쉐도우를 일으켜 중앙광장으로 데려갔다. 활발한 거리음악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분위기는 전보다 돈독해진 것도 같았다. 분수대의 물이 유달리 맑아 보였고, 하늘은 오늘따라 광활하고 높아 보였다.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상황. 커다란 벚꽃나무 아래에서, 조커는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것보다, 공주님 타이밍이 너무 안 좋아서 하지 못한 게 있는데 말이지?"


"…아, 블러디 레인이 여기 어디 있었는데 말이지."


"에이, 너무 그러지 말고~."


"그래, 뭔데 그러는데?"




공주님이라는 호칭이 마음에 안 든다며 투덜거리는 쉐도우를 바라보며, 조커는 능청스레 웃었다. 저래 보여도 진심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제 눈 감고도 알아맞힐 수 있었다. 되려 지금이 기회라고, 잔뜩 방심하고 있는 쉐도우에게 다가가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얼굴이 잔뜩 붉어진 뒤로 물러나 거리를 두려는, 쉐도우의 손을 꼭 잡아 붙잡는 것도 물론 잊지 않았다. 시선을 이리저리 피하던 쉐도우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무슨 의미려나?"


"모든 이야기의 종착점이지! 지금 우리가 내딛고 있는 이곳은 동화 속에서 왕자님이 공주님과 사랑을 이루는 하이라이트거든."


"뭐야, 우리 사랑하는 사이였어?"


"어라, 아니었어?"




사람들의 말소리가 하나둘씩 들리기 시작했다. 기나긴 동화가 끝이 나고, 현실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벚꽃잎이 하나 바람에 실려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고개를 돌려 큰 벚나무를 바라보았다. 작은 꽃송이가 얼굴을 내밀었다. 올해 꽃은 늦게 모습을 드러냈지만, 내년의 꽃은 아마 제시간에 얼굴을 보여줄 것이다. 아아, 그러고 보니 공원의 울음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대신 기적이 일어났다며 신께 감사를 구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잃어버린 소중한 사람이 전부 돌아온 모양이었다.




"좋아, 질문을 바꿀게."


"마음대로 해."


"날 사랑해?"


"널 사랑해, 언제까지나."




그것은 꽃샘추위였을까, 아직은 추운 어느 날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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